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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가족이 사는 법

(2) 물리학자 이기진 교수네
    김윤덕

    발행일 : 2003.05.13 / 느낌 C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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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취미는 이사 다니기”라고 자랑스레 말하는 서강대 물리학과 이기진(43) 교수는 결혼생활 12년동안 이사를 10번이나 다녔다. 신혼 초 세들어 살기 시작한 서울 마포를 비롯해 대치동, 염창동, 현석동, 동교동으로! 유학한 프랑스와 일본에서도 각각 두 번씩 집을 옮겼다. 계약이 아직 만료되지 않은 멀쩡한 집을 놔두고 뜬금없이 이삿짐을 싸는 이유는 “새로운 동네,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 덕에 이 집의 가구며 살림살이는 단출할 뿐더러 언제든 이사할 수 있게 세팅이 돼 있다.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 채린(13)이, 하린(8)이도 이사라면 이골이 났다. “강가에서 살고 싶다고? 그럼 오늘 밤이라도 알아볼까?” 하고 벌떡 일어서는 돈키호테 아버지를 둔 탓. 이젠 한 동네에 정착한 지 1년만 넘으면 아이들이 먼저 묻는다. “아빠, 우리 이사 안가?”

    이 교수의 희한한 취미는 그의 부친 이병혁(76) 박사와 무관하지 않다. 태양열 연구에 기여한 물리학자로 1991년 서강대에서 정년퇴임한 그는 퇴임과 동시에 아내와 함께 전남 신안 마진도에 내려가 배를 만들며 산다고 해서 화제가 됐었다. 1년 전엔 다시 서해안 대부도로 올라와 포도농사를 짓고 사는데, 농사일이 한가해지면 배를 타고 무인도를 탐험하는 게 노부부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이 교수 부인 홍유라(35·회사원)씨는 “시아버님이나 남편이나 보물섬 동경하는 꼬마선장처럼 산다”며 웃는다. 4남매 중 이 교수는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다. 자식들의 인생을 “지켜보되 간섭하지 않는” 부모 덕에 이 교수는 야구선수부터 문예반, 미술동아리까지 안해본 게 없다. 모교인 서강대에 ‘강미반’이라는 그림 동아리를 처음 만든 주인공이며, 일본 유학시절엔 판화로 개인전을 열었다.

    재주 많고 장난기 많은 아빠 때문에 즐거운 건 두 딸이다. 학교 갔다 돌아오면 아빠와 함께 신촌으로, 홍대앞으로 ‘순대국 산보’를 나서는 게 일과. 일본 살 때 한글을 깨칠 수 있는 방편으로 그림책을 만들어준 것도 아빠다. 자고 일어나면 싸우던 두 딸들이 잠잠해지기 시작한 것도 이 그림책 덕분이다. 동생이랑 허구헌날 싸우다 가출한 ‘빡치기 까까’가 남극과 북극, 우주로 여행을 하면서 사랑이 뭔지 깨달아가는 과정을 담은 이야기인데 벌써 세 권째 완성했다.

    모험심 강하고 부지런한 아빠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두 딸 역시 공부보다는 놀기를 좋아한다. 중학교 갈 때까지 학원 근처에는 가본 적 없는 채린이가 요즘 푹 빠져 있는 건 재즈댄스. 엄마 화장품을 갖고도 그림을 그리는 하린이의 최근 관심은 드럼 치기로 옮아가고 있는 중이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한테 공구 다루는 법을 배워 손재주가 좋은 채린이는 교실 단장하고 쓸고 닦고 하는 데는 선수예요. 하린이가 얼굴이 감자같이 생겼다고 왕따당하는 제 반 친구를 돌봐준다는 얘기를 듣고는 둘 다 감동 먹었죠. ” 가사와 육아분담도 민주적이다. 그 또한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전통! 아버지인 이 박사는 집안의 제사를 한꺼번에 치르게 하는 혁명적 조치를 취해오고 있다. 이 교수도 마찬가지다. 일요일 아침식사만큼은 ‘풀코스’로 책임지는 그는, “부모의 역할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고 보여주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나만의 생각과 색깔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둘다 모험이라는 점에서 과학과 예술은 일맥상통한다”고 행복해하는 이기진 교수. 요즘 이 식구들의 관심사는 다시 사진으로 옮아갔다. 벼르고 별렀다 마침내 구입한 독일제 중고 카메라. 필름에 담을 첫 번째 풍경은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 짓고 고기 잡고 사는 ‘꿈의 섬’ 대부도가 될 것 같다.

    /김윤덕기자 sion@chosun.com

    기고자 :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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