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메이지유신(1867년) 이후 2차대전 종전(1945년)까지 일본에서 일왕의 권위가 얼마나 절대적이었는지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1927년 11월 나고야에서 열린 대규모 관병식 도중 부락민(천민집단) 출신 일등병 기타하라 다이사쿠가 왕에게 달려가 부대 내 부락민 차별에 항의하는 진정서를 전달했다. 대열을 빠져나온다든가 왕에게 무엇인가 항의를 한다는 건 당시 용서받지 못할 무례와 불충(不忠)이었지만 아무도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이유는 단 하나, 관병식에 참가한 4만명 병사들이 왕 앞에선 완전 부동자세로 서 있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타하라는 자서전에서 "명령을 내리는 장교나 장군이나 모두 왕의 권위에 발이 묶여 꼼짝 못했다. 나만 예외였다"고 썼다.

▶바쿠후(幕府)를 무너뜨리고 새 나라를 연 메이지유신의 설계자들에겐 새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이 필요했다. 그들은 교토에 있던 허울뿐인 왕을 도쿄로 옮기게 하고 그의 권위를 신민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한 각종 장치를 발명했다. 1927년까지 일본에서 시행된 국경일 10개 중 9개가 역사상 왕의 탄생이나 즉위, 행차와 관련된 것이었다.

▶1945년 9월 27일 쇼와 일왕은 맥아더 연합국 점령군 사령관과의 첫 면담을 위해 일본 왕궁을 내려다보고 있는 맥아더 집무실로 갔다. 일왕은 연미복 차림으로 예를 갖추고 초췌한 표정의 부동자세로 서 있는데 맥아더는 평상복에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는 사진이 공개됐다. 일본 국민에게 반신반인(半神半人) 같던 일왕의 이미지는 그때 무너졌다.

▶당시 일본에서 미국 장군인 맥아더의 한마디는 일왕 이상의 권위와 힘을 갖고 있었다. 헌법 제정을 비롯해 현대 일본을 만든 중요한 조치들이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란 이름으로 행해졌다. 일본은 '국체(國體) 보존'을 위해 이를 받아들였다.

▶일본을 방문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14일 아키히토 일왕 내외를 만나는 사진이 눈길을 끈다. 아키히토는 쇼와 일왕의 아들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왕궁으로 일왕을 찾아가 악수하며 허리를 90도 가깝게 숙였고 일왕은 얼굴 가득 웃음을 띠며 그를 맞았다. 오바마 대통령이 도쿄에서 신아시아 정책 구상을 담은 연설을 하는 시각 하토야마 일본 총리는 일본을 떠나 싱가포르 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오바마의 외교적 제스처를 칭찬하는 소리도 많지만, 오바마가 그런 제스처를 취해야 할 만큼 미·일 관계도 변한 건 틀림없다. 기고자 : 김태익
본문자수 : 163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