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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일대기

빨치산서 수령변신 세계최장 독재자
45년 소군정 꼭두각시로 지도권 장악
문중시절 공산활동하다 퇴학 31년 중공당가입
48년 북한 초대수상 취임 정적제거-권력세습 구축
    안희창

    발행일 : 1994.07.10 / 1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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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 -. 그가 마침내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해방의 감격이 온누리를 휩쓸던 45년 10월 어느날, 북녘땅 평양에 김일성장군 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는 그후 49년에 걸쳐 38선 이북의 시간과 공간 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를 마음대로 사용한 뒤 한줌의 흙으로 돌아간 것이다.

    33세의 나이에 장군 이 된 그가 역임했던 자리는 무수하다.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북조선 인민위원회 위원장, 공화국내각 수상, 조선노동당 위원장, 조선노동당 총비서, 공화국 국가주석 등 . 한번도 2인자 가 된 적이 없이 49년동안 우리의 반쪽을 지배해왔다.

    철천지 원수 부터 위대한 수령 까지, 극과 극을 넘나들은 그의 생애를 알아본다.

    23년 홀로 평양 돌아와

    출생=김일성은 1912년 4월15일 평남 대동군 고평면 만경대리(남리) 칠골마을에서 태어났다. 부 김형직과 모 강반석사이 3형제의 장남인 김의 어린시절에 대해선 알려진게 거의 없다. 그가 7세때 부모와 함께 남만주로 이주한 이후부터 이력이 알려지고 있다.19년 가을 통화로 이주한 김일성은 그해 바다오거우(팔도구)소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다 23년 1월 홀로 평양으로 돌아와 창덕소학교 5학년으로 전학했다.

    25년 김은 아버지의 체포소식을 듣고 다시 만주로 가 무송중학교에 입학했다. 김은 년 화성의숙(한인학교)을 거쳐 27년 길림의 중국인 학교 육문중학에 입학했다. 김은 29년 중학생 신분으로 남만공산청년동맹 이라는 단체에 가입했다가 곧 체포돼 퇴학을 당한다. 이것으로 그의 정식교육 이수는 종료된다. 30년 봄 석방된 김은 본격적으로 공산주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1년 중국공산당에도 가입했다.

    북한에선 김이 14살이던 26년부터 2년동안 조선최초의 혁명적 청년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 과 역시 첫 소년혁명조직인 새날소년동맹 을 창설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은 이와함께 백산청년동맹 , 반제청년동맹 , 조선공산주의 청년동맹 등을 잇따라 창설하고 신문 새날 도 창간했다고 북한의 역사교과서는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이 신빙성이 없음은 물론이다.

    유격대 활동여부 논란

    유격대활동=김일성이 항일 유격대활동을 제대로 했느냐의 여부, 했다면 어느 정도였느냐의 대목은 우리 사회에서 상당히 논란을 불러일으켜 왔다. 이는 8일 사망한 김일성이 30년대 만주에서 결성된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군 6사장으로 활약했던 김일성 이라는 서대숙교수(미 하와이대)의 주장과 그렇지않다는 이명영교수(성대)의 반론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선 이교수에 따르면 8일 사망한 김일성은 본래 6사장이었던 김일성 의 동명이인이라는 것. 진짜 김일성 , 즉 6사장 김일성은 1901년 함남태생으로 본명은 김성주이며 37년 11월 13일 전사한 반면 북한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 유격대시절에는 김일성 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6사의 대원에 불과했다는 것.

    그러나 서교수는 김일성이 상당한 수준에서 항일 유격대 활동을 벌인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대목과 관련, 서교수는 "김일성은 35년이전에 전투를 수행했다고 주장하나 이것은 소규모 작전이었고, 36년 무렵부터 뚜렷한 작전을 전개했다"면서 김의 활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김은 34년 동만주에서 결성됐던 항일연군의 하나인 2군의 제2독립사 제1단 제3지대의 전사였다. 그러다 38년 5월 1군과 2군을 합쳐 창설된 제1로군의 2군 제6사장으로 승진했다. 김은 이어 같은해 월 1로군이 3개 방면군으로 재편됐을때 간도지방을 담당한 제2방면군의 군장이 됐다. 김은 41년 3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소련령 연해주로 퇴각하기 전까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그중 37년 6월 4일 혜산진근처 마을인 보천보에 대한 공격이 가장 성공적인 전투였다. 김일성부대의 수는 많을때에는 중국인과 한인을 합쳐 3백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어떤 때에는 50명 이하였다. "

    이에대해 이교수는 이렇게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6사장 김일성(김성주)이 전사하자 새 지휘자가 된 사람이 김일성 이란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38년 제2방면군장이 된 그는 용정에 있던 대성중학교 학생으로 30년 5 30 간도폭동사건 때 행동대장으로 활약한 사람이었다. 1906년생으로 본명은 김일성 이었다. 그의 아내는 2방면군의 여자청년부장인 김혜순이었다. 그녀는 40년 4월 일본군에 체포된 후 남편에 대해 털어놓았다. 그에 관한 기사가 40년 7월 5일자 조선일보에 실려있다. 북한은 2방면군장 김일성이 남겨놓은 사진 3장(한장은 처와 찍은 것)을 확보했으나 이를 조선혁명박물관에 전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 부부의 사진이 아니기 때문이다. "

    요는 김일성 이라는 이름을 갖고 만주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벌인 사람은 3명이었고, 그중 8일 사망한 김일성은 가장 미미한 수준 에서 활동을 벌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 그런데 북한 역사가들은 김이 32년 4월 25일 안도에서 최초의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고,연길 등 다른지역의 빨치산부대를 규합, 36년 2월 조선인민혁명군 을 조직했다고 주장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 대목은 김일성전기가 새로 나올때마다 그 구체적 내용이 달라져 신빙성이 없다는 평가다. 30년대 만주지역에서 조선인들이 독자적으로 활동한 무장조직의 기록은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일치된 지적이다. 그러나 북한은 김일성의 인민혁명정부가 36년까지 완전유격근거지 라는 곳에 존재하면서 토지무상분배, 8시간노동제, 최저임금제, 납세폐지,남녀평등권, 무료 의무교육 등을 실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일성 동명이인 3명

    북한은 또 김이 36년 6월 조직한 한인조국광복회 가 45년 8월 해방될 때까지 2백20만 회원을 거느리며 활동한 끝에 조국을 해방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국광복회는 백두산밀영 을 본부로 만주전역과 서울, 부산, 인천, 남포, 평양, 원산 등에 1백여지부가 있었던 것으로 돼있다. 그러나 이같은 주장은 김이 한인조국광복회 의 회원이었다는 점을 제외하곤 대부분 허구다. 관동군의 토벌에 밀려 소련으로 피신한 김일성은 몇몇 대원들과 함께 소련국경경비대에 일시 구금상태에 놓였다가 이미 40년 소련으로 탈출한 저우바오중(주보중 2로군총사령)의 신원확인으로 풀려났다. 김은 곧 블라디보스토크 근처 오케얀스카야 야전학교에서 훈련을 받고 소련군 극동군사령부 직속 88특별여단 에 배속됐다.

    하바로프스크근처의 비야츠크라는 촌락에 주둔한 이 부대는 만주와 조선지리에 밝은 한인-중국인 유격대들을 훈련시켜 대일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창설됐다. 조선인이 60여명인 이 부대에서 김은 소련군 대위계급과 함께 제1대대장으로 임명됐다. 88특별여단에서 몇차례에 걸친 첩보활동으로 능력을 발휘한 김은 45년 해방이 되자 그해 9월 19일 원산항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왔다.

    평양위수 부책임자로

    정권쟁취=평양에 들어온 김은 빨치산 동료 최용건과 함께 소련군으로부터 평양위수사령부 부책임자라는 직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미 그 당시 소련 극동군 군사위원 스티코프에 의해 북한의 통치자로 내정돼있었다. 김은 여단에 있을때 소련의 북한공산화정책을 이의없이 실천해준 인물로 낙점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소련의 방침에 따라 김은 북한의 통치자로서의 수순을 밟아나갔다. 소련군정은 45년 10월 14일 소련군 환영 평양시민 군중대회 를 개최하고 33세의 김성주를 김일성장군 으로 소개했다.

    이에앞서 소련군정은 45년 10월 10일 극비리에 열린 조선공산당 서북5도 책임자및 열성자대회에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했다. 이 대회는 북한에 별도의 공산당을 조직, 김으로 하여금 지도권을 장악케하려는 소련군정의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

    김은 46년 2월 정권기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를 창설하고 위원장이 돼 당은 물론 정권기관의 책임자로 등장했다. 김은 이어 북조선 인민위원회위원장(47년 2월)을 거쳐 48년 9월 9일 수립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초대 수상으로 취임했다.

    휴전직후 남로당 제거

    권력투쟁 및 족벌지배체제 확립=6 25전쟁이 끝난후 김일성은 권력을 공고히 하기위해 빨치산파를 제외한 다른 정적들을 하나씩 하나씩 숙청해나갔다. 첫번째 대상은 남로당계. 휴전직후부터 벌어진 이들에 대한 숙청은 년 박헌영을 사형시킴으로써 일단락됐다. 김은 이어 무정(포병사령관)-박일우(내무상)-방호산(6사단장) 등 연안파 장군들을 제거한데 이어 56년 유명한 8월종파사건 을 통해 김두봉(최고인민회의 위원장)-최창익(부수상) 등 연안파 거물을 숙청했다.

    김은 또 허가이(조직담당 비서)등 소련파를 제거한데 이어 연안파-소련파를 숙청하는데 총대를 멘 박금철 이효순 등 갑산파와 허봉학등 몇몇 빨치산파 장군들을 좌익맹동주의자라고 숙청했다.

    김은 이같은 숙청을 통해 권력의 핵심자리를 친인척들로 메워 족벌지배체제를 확립했다. 한편 김은 이 기간중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위해 유일사상 체계확립 이라는 캠페인을 전개, 이를 주체사상 으로 명명한후 북한의 최고규범으로 제도화했다.

    즉 모든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무조건적으로 충성토록 제도적 조치를 갖추어놓은 것이다.

    권력세습=20년 가까이 걸린 숙청을 통해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한 김일성은 72년 12월 채택된 사회주의 헌법을 통해 국가주석이라는 또다른 타이틀을 얻었다. 주석 은 국가의 수반이며 국가주권을 대표하며,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 으로 신설된 중앙인민위원회의 수위. 결국 당과 행정부의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된 것이다. 그후 김일성은 74년 2월 김정일을 정치국 위원으로 앉히면서 김정일을 후계자로 확정,시대착오적인 권력세습을 사망하는 날까지 시도해했다. <안희창기자>

    김일성 연표

    1912년4월15일.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 칠골(현재의 만경대)에서출생

    23년. 만주 팔도구 소학교 졸업

    26년. 만주 길림 육문중학 중퇴

    31년. 중국공산당 입당

    35년. 동북항일 연군활동

    36년. 조국광복회 조직

    37년. 보천보 습격

    40년. 소련으로 망명

    45년. 소련군 소좌, 입북

    46년. 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

    48년. 수상

    4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위원장

    50년. 6.25남침. 군사위원회위원장, 인민군최고사령관

    53년. 원수, 영웅 칭호

    66년. 로동당중앙위원회 총비서

    72년. 국가주석. 국방위원회위원장

    84년. 동구권8개국 순방

    92년. 대원수 칭호

    94년7월8일. 사망.

    기고자 : 안희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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