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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실크 두루마기를 벗고 민망한 분칠도 지울 때가 됐다. 원판 불변의 법칙이 있다는데 ‘개그 콘서트’의 ‘옥동자’가 광대처럼 하얗게 분 바른다고 장동건이 되지는 않는다. 이제 잔치는 끝났다. 누가 뭐래도 전쟁의 위기가 어느 때보다 고조되는 불안하고 불확실한 시점에서 우리는 성숙된 철학과 정체성을 지닌 대통령을 원한다.

나머지 1300만명의 절대적 박탈감, 그 깊은 상처를 덧찌르며 지난 두 달여간 새 대통령과 대통령을 만든 사람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이 TV 또는 매체를 통해 온갖 수사적 표현의 남발과 열정 혹은 솔직함으로 미화시키려는 미숙함과, 자신들 패거리 이외의 모든 사람과 매체를 적으로 간주해 국민들을 단순 이분법해서 분열시키는 비논리적·일방적 언어의 테러를 보면서 우리에게 과연 내일이 있을지 암담해질 뿐이다.

그럼 그 자리에서 어떻게 말해야 하나? ‘내 진심은 그게 아닌데 왜 그렇게 듣느냐?’ 식의 응석이 담긴 유머에도 이제 식상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말이 조금씩 바뀌고 말의 뉘앙스가 모호하게 들려 미국은 미국대로, 국민은 국민들대로 안개 속처럼 혼란해하는 일이 두 달여 동안 반복되어 왔다. 그래도 그때는 어디까지나 당선자 시절이었다. 봐줄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대통령이다. 대통령은 연습해보는 자리가 결코 아니다. 새 대통령은 특히 소외계층에 신경을 쓰겠다고 했다. 대선 패배의 상실감에서 상처를 깊이 느끼는 절반의 국민들 역시 아직은 정신적 소외계층이다. 15년 전의 ‘땡전(全) 뉴스’를 상기시키며 떠들썩하게 전국을 도는 당선자의 웃음에 승자로서 나머지 1300만명에 대한 아량과 위로와 배려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TV를 껐다고 한다.

물론 새 정부가 내놓은 정책방향은 나무랄 데가 없다. 정치·재벌·언론·검찰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 대한 개혁의지 역시 대찬성이다. 하겠다면 오히려 시간 끌지 말고 빠를수록 좋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그 개혁의 방향과 목적이 무엇인가에 있다. 세계 속에서, 미국뿐 아니라 북한에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적 존엄성과 자존심을 제대로 찾고, 국민 모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혼란과 부패, 무원칙과 부정직에 더럽혀진 국민들의 정신적 기품을 되찾는 데 개혁의 목적이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원칙대로 누가 봐도 고른 잣대로 형평성 있게 제대로 다 개혁해야 한다. 미운 놈, 고운 놈 나눠서 정권의 필요에 따라 아전인수격으로 취사선택하는 보복성이라면 그것은 이미 개혁이 아니라 권력을 남용한 범죄다. 그런 면에서 검사 출신으로 보다 못해 당론을 위배하며 직언한 함승희 의원의 대북송금 수사촉구 발언은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한 양심적 발언인데도 보석과 같이 여겨지는 현실이다. “5년 후 어떻게 될지 모르고 까불고 있다”는 한 의원의 충고를 벌써 듣는 새 정권은 우선 자신들을 돌아보고 먼저 스스로 철저히 개혁하는 게 순서가 아닐는지?

우리나라는 대통령 한 사람 바로 서면 다른 건 저절로 다 잘 될 수 있다는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자신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고 그외에는 잔인하게 대할 적(敵)으로 몰아가는 단순분리법은 유치한 아이들의 전쟁놀이 논리다. 일국의 대통령이나 정권이 취할 태도가 절대 아니다. 비록 50%로 당선된 대통령이라도, 그 50%만의 대통령이 아니라 나머지 50%의 대통령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새 대통령에게 충정으로 제언한다. 인사청탁하면 본전이 아니라 패가망신하게 된다고 했다. 남아일언은 중천금이다. 보통의 남자도 그런데 하물며 대통령의 대국민 경고였다. TV에서 김해의 노건평씨가 밝힌, 받아 놓은 장관인사청탁 두 개의 이력서를 공개하고 그 사람들을 본보기로 패가망신시켜주기 바란다.

대통령의 형은 그런 청탁 봉투를 추상같은 나무람으로 문전에서 돌려보내지 않고 왜 받아 안방에 보관하며 생각하고 있어 친인척 비리의 더러운 악몽을 떠올리게 하는지? 이 문제는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어쩌면 노 대통령의 참여정부의 알파요 오메가일 수 있다. 대통령의 말이 그냥 가벼운 말로 끝나지 않고 말 한마디가 곧 사려깊은 고뇌의 결론이며, 고고한 철학이라는 것을 이 기회에 꼭 보여주었으면 한다. 자신에게 먼저 엄격한, 신뢰할 수 있는 대통령을 진심으로 원하기 때문이다.

오 정 인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