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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초라도 안 보이면, 이렇게 초조한데, 3초는 어떻게 기다려, 이야이야이야이야. ”

새해를 이틀 앞둔 12월 30일 오후 7시. 이미 캄캄해진 산동네 저녁 하늘에 지수의 신바람 나는 ‘숫자송’이 메아리친다. 100ｍ쯤 떨어진 ‘중계마을 복지회관’의 공부방에서 지수가 돌아오는 길이다.

지수가 윗집 이씨 할머니, 길 건너 통장 댁, 그 옆집 우씨 할머니 집을 돌면서 ‘숫자송’과 함께 “우리 할머니 여기 계셔요?”를 외쳤다. “안 계셔”란 대답뿐,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는 미동도 없다. 매일 반복되는 꼬마 천사의 ‘작은 소란’에 너무나 익숙하기 때문이다.

서울 수암초등학교 1학년 1반 김지수(여·7). 지수가 할머니 윤공순(61)씨와 단둘이만 산 지 벌써 4년 반이 됐다.

99년 7월 11일 새벽, 지수 아빠(김명진·당시 26세)는 청주 부근 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 청주 공사판에 가던 길이었다.

“16년 전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 믿고 살았어. 그런데 며느리는 지수가 젖을 떼기도 전에 도망가고, 그 1년 뒤 아들마저 죽었으니…. 지수에게 회초리를 들 때면 울면서 아빠를 부르고, 나는 그 소리에 또 아들이 생각 나 울고…. ” 할머니는 아들 얘기를 하면서 또 눈물을 쏟았다.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산 104번지. 시내버스 10번 종점에서 산비탈을 따라 난 거미줄 같은 골목길을 1km쯤 올라오면 지수네 단칸방이 있다. 방문을 열면 왼쪽 벽에 돌사진과 세 살 때 사진, 어린이집 졸업사진 3개가 걸려 있고, 그 밑에 지수의 책상, 그 옆으로 방을 빙 돌며 책꽂이와 TV, 장롱과 옷장, 전화기와 냉장고가 촘촘히 놓여 있다. 책꽂이 끝에 대각선으로 연결된 빨랫줄엔 옷가지 몇 개가 걸려 있다. 가운데의 길쭉한 빈 공간 중, 연탄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은 가로·세로 120cm 정도. 나머지 방바닥은 냉골이다. 방 한쪽엔 플라스틱 요강도 있다. 할머니는 “마당 끝에 옆집과 함께 쓰는 재래식 화장실이 있는데 지수가 밤엔 무서워서 못 나간다”고 했다.

“이 산동네에서만 30년 동안 네 번 이사 다녔어. 간경화를 앓던 남편을 잃은 뒤엔 동대문역 부근 D빌딩에서 9년, 노원역 부근 M백화점에서 7년 동안 죽을 둥 살 둥 청소만 해서 600만원을 모았어. 저 꼭대기에서 전세 30만원짜리에 살다가 그 돈으로 이 집에 전세 든 거여. 30만원짜리에 비하면 여기는 대궐이야. ”

그러나 그 ‘대궐’에는 따뜻한 물이나 머리 감을 공간조차 없다. “겨울철엔 1주일에 한 번 일요일마다 근처 목욕탕에서 3500원씩에 머리도 감고 때도 벗겨. ” 찬물에 부르튼 할머니의 손이 갈라지고 벌겋다.

부엌 입구엔 연탄 30여장이 쌓여 있다. 할머니는 “하루에 두 장씩 때니까 저걸로 보름은 버티겠지”라며 “작년에는 연탄 걱정은 없었는데, 올해는 연탄도 걱정”이라고 했다. 이 동네 연탄값은 100장에 3만4000원, 300장에 9만4000원이다.

할머니는 ‘의료급여 2종 기초생활수급권자’다. 옛날 말로 ‘2종 영세민’인 셈이다. 나라에서 월 46만8000원을 지원받는다. 할머니 통장엔 정부 지원금이 들어온 직후 많을 때는 60만원 정도였다. 매달 두 사람 생명보험과 건강 보험료로 10만7000원이 빠져 나간다. 12월 22일 현재 잔금은 7만7634원. 매달 2만원씩 송금해주는 ‘오광자’씨는 누굴까? 할머니는 “1년 넘게 돈을 보내주는, 얼굴도 목소리도 모르는 천사”라고 했다. 별도로 저축하는 것은 없단다. 할머니는 “마을복지회관 수녀님들이 지난 5년간 지수 똥·오줌도 닦아주고, 공부도 시켜 주는 등 주변의 도움으로 이만큼 키웠다”고 공을 돌렸다.

지수는 어릴 땐 잔병치레가 많았지만, 지금은 건강한 편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요즈음 관절염 때문에 거의 매일 병원에 간다. 인근 파티마의원 장현재 원장은 “예전엔 지수가 잘 먹지 않아 많이 아팠고, 작년부터는 할머니가 무릎 관절염과 고혈압·골다공증 등 성인병으로 고생한다”고 했다. 지수 할머니는 위쪽 앞니와 어금니 두 개가 없지만, “그런 것은 다 괜찮고 관절염이나 나아 돈을 더 벌어 지수가 원하는 공부를 더 시켜주고 싶다”고 했다.

재작년 여름엔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다. 요즘도 그런 생각을 할까? 할머니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 책임으로 지수를 키워야 하는데 죽기는 왜 죽어?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지수를 더 잘 가르칠 수 있을까만 생각하는데…. ”

주민등록상에는 할머니가 ‘세대주’, 지수가 ‘세대원’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글을 아는 지수가 이 집 주인이고, 내가 지수에게 얹혀 산다”며 “내년에는 마을복지회관에 나가 한글을 배울 것”이라고 지수와 약속했다. 지수는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다. 지수가 “나중에 돈도 많이 벌고 큰 집도 사서 할머니 따뜻한 물로 설거지 하실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하자 ‘작은 대궐’엔 웃음꽃이 피어났다.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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