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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1일 오후 서울 중계본동 104번지 산동네 꼭대기에 있는 박진심(77) 할머니의 단칸 셋방. 인근 중계4동 재현중학교 2학년 신한나(14)·고신주(14)양이 찾아와 박 할머니의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렸다.

2주 전 친구들과 이 산동네를 찾은 후 두 번째 방문이다. 재현중학생 13명이 이곳을 처음 찾은 것은 지난달 18일. 자발적으로 온 게 아니라 학교에 제출할 봉사활동 시간을 ‘채우기 위해’ 찾았다.

그러나 학생들의 태도는 이내 바뀌었다. 윤승진(13·재현중 1년)군은 “TV 드라마에서 일부러 ‘촬영 세트’를 꾸며놓은 줄 알았는데, 실제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이렇게 어려운 곳이 있는 줄 몰랐어요”라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이창성(13·재현중 1년)군은 “숨이 헉헉 차 오르는 빙판길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질 뻔했는데 노인들은 어떻겠어요”라고 했다.

윤·이 군은 꼬불꼬불 비탈길을 1km 가까이 허덕거리며 올라 맨 꼭대기 권순옥(83) 할머니 댁을 찾았다. 전세 300만원짜리 단칸 셋방에서 일행을 반갑게 맞은 권 할머니. “우리 집은 할 일이 없고, 이렇게 외로운 할머니를 찾아와 말벗만 되어줘도 고맙다. 얘기나 하자. ” 하지만 두 학생이 할머니 어깨와 다리를 번갈아 주물러 드리자 1평 남짓한 방안에는 웃음꽃이 피어났다.

“어른들 계시면 잘 해 드려라. 요새는 학교에서 글만 가르치지 않고 별 것 다 가르치네. 학생들 참말로 고마워. ” 두 학생은 이어 연탄재 10여 장을 날라와 비탈진 빙판 길에 깔았다. 다른 학생들도 이날 독거노인들을 찾아 연탄불 갈아 드리기, 빙판길에 연탄재 뿌리기, 집안 청소와 문풍지 고치기 등의 봉사활동을 했다.

독거노인 10여 가구를 돌며 봉사활동을 마친 학생들은 자선단체 평화의 집에 모여 반성 모임을 가졌다. “도와 드리러 왔다가 오히려 도움만 받고 따뜻한 마음을 배워 왔어요. ”(육미령), “외로우신데도 할머니 웃는 모습이 귀여웠어요. ”(홍지윤) 친구들이 한 마디씩 소감을 말할 때마다 방안은 건강한 미소가 번져갔다.

이들 가운데 “해 드린 게 별로 없지만 재미 있었고, 다음에 또 오겠다”고 했던 신한나·고신주 학생이 2003년의 마지막 날 약속을 지켰다. 다시 평화의 집을 찾은 것이다.

서울 노원구 중계3동 평화종합사회복지관에 가면 1급 정신지체 장애인인 민종배(39)씨를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이 복지관 3층의 ‘그룹 홈’에서 전체 치매 노인 30여 명 중 대·소변을 못 가리는 중증 노인 10여 명의 똥·오줌을 치워주는 게 그의 주된 업무다.

노인들의 아랫도리를 벗기고 똥·오줌이 묻은 기저귀를 빼낸 뒤 지저분한 것들을 물수건으로 싹싹 씻고 나서 새 기저귀를 채운다. “기저귀 갈고 나서 좋아하시는 할아버지 표정 보셨죠? 그 맛에 이 일을 합니다. 남들이 더럽다고 못 하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더 즐겁고요. ”

임춘식 복지관장은 “저렇게 꼭 10년 동안 매일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 치매 노인들 똥·오줌을 받아내고 운동시켜 드리고, 청소 등 잡일을 해 왔다”고 말했다.

복지관에서 코 앞에 있는 17평형 영구임대 아파트가 종배씨의 셋째 형 민석재(44)씨와 형수 정경혜(44)씨 집이다. 대학생인 큰 조카, 초등학생인 두 여 조카, 미혼인 큰 형(50)과 종배씨까지 모두 일곱 식구가 산다.

일곱 식구의 월 생활비는 6년 전 퇴행성 관절염에 걸린 셋째 형 석재씨가 ‘조건부 기초생활수급자’여서 정부에서 받는 18만원과 형수인 정씨가 독거노인 10여 명을 돌보면서 받는 24만원이 거의 전부다.

민종배씨의 자랑은 조카들이다. 아름다운 마음의 삼촌을 닮아서인지 조카들은 반듯하게 컸다. 은혜(12)는 청계초등학교 1학기 전교 어린이회장, 5학년인 지혜(11)는 2학기 전교 어린이부회장이다. 은혜의 꿈은 소아과 의사, 지혜의 꿈은 의상 디자이너다. 지금 당장 부족한 것은 참고서와 책이라고 한다. 은혜는 “장애인이지만 변함없이 노인들에게 봉사하는 삼촌이 제일 자랑스럽다”면서 “누구나 주어진 환경에 자책하지 말고 ‘작은 희망’을 품고 열심히 살면 행복할 수 있다”고 했다.

특별취재팀

진성호 사회부 차장대우 shjin@chosun.com

이항수 사회부기자 hangsu@chsoun.com

선우정 경제부기자 jsunwoo@chosun.com

신동흔 산업부기자 dhshin@chosun.com

방준오 사회부기자 obang@chosun.com

정지섭 사회부기자 xanadu@chosun.com

안상미 사회부기자 ma7708@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