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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양재동 비닐하우스촌, ‘산마을’에서 15년 동안 살아온 터줏대감 이영순(58)씨는 10년째 몸에 여섯 가지 병을 안고 산다. 관절염, 골다공증, 허릿병(척추디스크로 추정), 당뇨병, 고혈압, 빈혈.

하지만 이씨는 3일 오전 6시 ‘천근’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남편 한성만(64)씨는 발목을 다친 뒤 3년째 치료를 받지 못해 생업(막일)을 못 나가고 있다. 아들이 맡긴 두 손녀(중1·초5) 역시 이씨가 돌봐야 한다.

지난 3일 새벽 6시30분 이씨가 집을 나서 첫 일(청소)을 나간 곳은 서울 양재동 교육문화회관 후문 근처 Y빌딩. 아침 7시, 이씨는 텅 빈 건물을 열쇠로 열고 들어갔다. 지상 5층, 지하 1층 6개 층의 남녀 화장실, 계단, 복도 사무실 2개가 그녀가 청소해야 할 곳이다.

일을 하다 한 번 무릎을 꿇으면, “하나, 둘, 셋”을 세면서 움직인 후 바닥을 짚고 겨우 일어선다. 그때마다 고통스런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이씨는 5층부터 지하까지 계단 손잡이를 손걸레질할 때도, 엘리베이터에 쪼그리고 앉아 사방을 닦을 때도 왼손만 사용했다. 그녀는 작년 7월 말 일을 하다 넘어져서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기 때문이다.

이런 고역(苦役)은 오전 11시까지 이어졌다. 이렇게 1주일에 3번을 일하고 이씨가 받는 월급은 20만원. 하루 1만6600원꼴. 이씨는 빌딩 청소를 마치고 서울 양재동 주택가 놀이터 두 곳을 다시 1시간 동안 청소했다. 여기서 받는 월급은 10만원.

이씨 가족에겐 국가 지원도 없다. ‘무허가 비닐하우스촌’에 살기 때문이다. 이씨의 주민등록지는 친지가 사는 서울 양재동 빌라마을. 법적으로 무허가 거주지인 산마을에선 주민등록이 불가능하다. 이씨는 “주민등록지 전셋값이 6000만원이 넘어 기초생활수급대상이 될 수 없다는 구청의 통보를 받았다”고 말했다.

“작년에 너무 몸이 아파 일을 못할 때 학교 선생님이 전화를 했어요. ‘아이들(손녀)이 급식비를 못내 점심을 굶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울컥 눈물이 나고, 일을 안 나갈 수 있나요…. ”

기초수급대상자 자녀들은 급식비가 면제된다. 하지만 이씨처럼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에겐 아무리 아프고, 가진 게 없어도 아이들 급식비조차 지원되지 않는다. 다행히 학교 선생님이 사정을 서초동 사랑의교회에 전해줘 매달 10만원씩 지원을 받는다.

산마을에는 이씨처럼 몸이 아픈 사람이 많다. 일생 이어지는 고된 노동, 영양 결핍, 지속적으로 노출된 질 나쁜 주거 환경의 결과다.

산마을 판잣집에 사는 은지(11) 엄마 김기화(53)씨는 간경화로 세숫대야 바닥에 고일 만큼 붉은 피를 토할 때가 많다. 김씨의 양쪽 무릎은 관절염으로 곧게 펼 수 없을 만큼 퉁퉁 부어 있었다. 은지네 집 현관문 옆에는 한달에 100만원씩 들어가는 병원비 청구서가 가득 들어 있는 노란 비닐봉투가 걸려 있다.

‘줄눈공’ 이상일씨 어머니 여옥련(76)씨는 녹내장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뒤 나머지 한쪽 눈도 백내장을 앓고 있다. 여씨 윗집 비닐하우스 거주자인 이순자(60)씨는 2년 전 뺑소니 사고로 집 안에서만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두 다리가 부자유스런 상황이다.

서울 서초·강남구 일대 비닐하우스촌에서 아픈 사람을 돌봐주는 천주교 평화의 집 김혜련(40·강남 성모병원) 간호사는 “간호사 도움이 필요한 60명의 환자 중 당뇨와 고혈압을 함께 갖고 있는 사람이 15명, 뇌졸중을 앓고 있는 사람이 10명이다”라고 말했다. 강도 높은 노동으로 관절염과 골다공증은 비닐하우스촌 노인의 거의 공통된 질병이라고 한다.

천주교 빈민사목위원회가 서초·강남·송파구 비닐하우스촌에서 실시한 2002년 5월 조사에 따르면, 118명의 응답자 중 75명(63.6%)이 “관절염 고혈압 당뇨 빈혈 골다공증 등 만성 질환을 갖고 있다”고 답했다.

특별취재팀

진성호 사회부 차장대우 shjin@chosun.com

이항수 사회부기자 hangsu@chsoun.com

선우정 경제부기자 jsunwoo@chosun.com

신동흔 산업부기자 dhshin@chosun.com

방준오 사회부기자 obang@chosun.com

정지섭 사회부기자 xanadu@chosun.com

안상미 사회부기자 ima7708@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