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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광복 60주년 특별기획
제1부 <1> 프롤로그
연재를 시작하며… 臨政현장을 가다
    이선민

    발행일 : 2005.01.03 / 특집 A1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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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구 피신처 嘉興

    ◆이봉창·윤봉길의 ‘배후’ 김구, 시골로 숨다

    중국 상해에서 절강성의 성도(省都) 항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탔다. 상해에서 항주까지의 거리는 168km. 그 중간 100km 되는 지점에 있는 가흥(嘉興)이라는 작은 도시가 목적지다. 가흥은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거 이후 김구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이 피신한 곳이다. 이봉창·윤봉길 의거로 일본 제국주의의 탄압이 날로 심해지자 상해에 있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항주로 옮겨갔다. 하지만 두 사건의 배후 조종자였던 김구는 거액의 현상금이 걸리는 바람에 따라갈 수 없었다. 김구와 김구의 어머니, 두 아들 인·신, 그리고 이동녕·김의한·엄항섭은 중국 국민당 간부 저보성의 고향인 가흥으로 숨어들었다.

    가흥 톨게이트를 빠져나가자 먼저 신시가지가 나왔다. 시정부 청사 뒤를 돌아가니 오래된 건물들이 보인다. 김구 일행이 머물던 매만가(梅灣街)는 구시가지 남문 밖에 있다. 마침 매만가 일대는 김구 일행이 살던 집을 비롯해서 재개발 공사가 한창이었다. 길을 안내한 진건강(陳建江) 가흥시 문물관리처장은 “가흥시 예산으로 당시 모습을 그대로 복원하고 바로 옆에 김구 선생 기념관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구가 살던 집은 서남호(西南湖)라는 호숫가에 있다. 2층 침실에서 내려다 본 서남호는 한가로웠다. 하지만 김구에게는 이곳도 안전하지 않았다. 일제 경찰의 촉수가 가흥까지 뻗어왔기 때문이다. 그해 8월 김구는 거처를 가흥에서 남쪽으로 50km쯤 떨어져 있는 해염(海鹽)현 남북호(南北湖)라는 호숫가로 옮겼다.

    가흥에서 남북호까지는 시골길이어서 자동차로도 1시간 가량 걸렸다. 김구가 숨은 곳은 저보성의 며느리 주가예(朱佳♥)의 친정 소유 여름별장이었다. 언덕길에 올라서자 왼쪽으로 ‘김구피난처’라는 안내판이 보였다. 집 안은 옛 모습대로 보존되고 있었고, 바로 옆에는 김구와 남북호의 인연을 말해주는 기념관이 있었다. 김구는 이곳을 드나들던 비서 안공근(안중근의 막내동생)·엄항섭 등을 통해 항주의 임정 상황을 전해듣다가 6개월 만에 가흥으로 돌아왔다.

    임정이 가장 어려웠던 이 시절, 요인들의 삶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었다.

    김구가 숨어있던 집에는 언제나 배가 한 척 매어 있었다. 만일의 경우 비밀통로로 빠져나와 호수를 이용해 피신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미 60대에 접어들었던 이동녕은 30~40대의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거친 밥을 먹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가흥과 해염의 경우처럼 임정 요인과 관련된 중국의 자취는 새롭게 주목을 받고 있다. 한국과 중국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찾는 한국인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상해 임정 청사의 한국인 방문객은 지난해 20만명을 넘어섰고, 이제 그 물결은 중국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그러나 임정 유적을 찾는 사람들은 과연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풍찬노숙(風餐露宿)하던 독립투사들의 마음과 정신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 마지막 활동지 重慶

    ◆다시 확인한 진리 “뭉쳐야 힘을 발휘한다”

    상해 홍교 공항을 이륙한 중국항공 비행기는 2시간 반을 날아 중경(重慶) 상공에 이르렀다. 창밖으로 산과 고원으로 둘러싸인 인구 3000만의 중경 시내가 내려다보였다.

    중국 서남부의 내륙오지 도시 중경이 한국인에게 친숙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마지막 5년 동안 머문 곳이기 때문이다. 1932년 상해를 떠난 임정은 중국 중·남부를 떠돌다가 1940년 9월 국민당 정부의 임시수도 중경에 자리잡았다. 국민당 임시 정부가 들어오기 전 인구 10만에 불과했던 중경은 당시 인구 100만의 대도시로 갑자기 팽창한 곳이었다.

    임정은 중경에서 청사를 세 차례 옮겼다. 지금 ‘대한민국림시정부’ 간판이 걸려있는 곳은 연화지(蓮花池)의 마지막 청사다. 양유가(楊柳街)와 석판가(石板街)에 있던 첫 번째·두 번째 청사는 일본군의 공습으로 파괴됐고, 오사야항(吳師爺巷)의 세 번째 청사는 낡은 주택가로 재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다.

    중경 도심인 칠성강(七星崗)에서 택시를 내려 백화점 옆 골목으로 들어서자 사진에서 보던 임정 청사가 있었다. 지난 1995년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복원된 청사는 5개의 건물로 이뤄져 있다. 맨 뒤의 한 일(一) 자 건물인 4호는 없어졌던 것을 독립운동가들의 증언을 토대로 복원했다. 1호 건물에 자리잡은 ‘임시정부 약사(略史) 전시실’과 ‘군사활동 전시실’을 이선자(李鮮子) 중경임정 구지진열관(舊址陳列館) 부관장의 안내로 돌아보면서 임정의 활동이 생각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다방면에 활발했음을 알게 됐다.

    중경의 임정 유적 중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곳은 광복군 총사령부 구지다. 중경의 번화가인 해방비(解放碑) 부근에 있는 이 3층 건물은 1000평 남짓한 작지 않은 규모다. ‘미원(味苑)’이라는 사천요리 식당 안에 있는 통로를 통해 낡은 건물로 올라가자 광복군 훈련장이었다는 마당이 보였다. 이선자씨는 “한국 정부가 이곳에 광복군 기념관을 만들고 싶어하지만 워낙 중심가라서 중경 시정부에서 허가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上海 외국인공동묘지

    ◆상해 외국인 공동묘지에 묻힌 독립의 꿈

    상해 시내 서남쪽에는 송경령능원(宋慶齡陵園)이 있다. 손문의 부인 송경령이 1981년 세상을 떠난 후 안장되기 전까지 이곳의 원래 이름은 만국공묘(萬國公墓)였다. 만국공묘에 묻힌 사람 중에는 노신(魯迅) 등 중국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외국인이었다. 그 중에는 상해 임시정부의 초기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박은식(朴殷植) 신규식(申圭植) 노백린(盧伯麟) 김인전(金仁全) 안태국(安泰國) 등이 포함돼 있다.

    문을 들어서자 등소평이 썼다는 거대한 기념비와 송경령의 좌상(坐像)이 보였다. ‘외국인묘원(外國人墓園)’이라고 쓴 안내판을 따라가자 600여 기(基)의 평분(平墳)이 수십 줄로 늘어선 만국공묘 자리가 나왔다. 상해 복단대(復旦大)에 방문교수로 와 있는 한시준(韓詩俊) 단국대교수에게 미리 설명을 들었기 때문에 임정 요인들의 묘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들의 유해는 1993년 8월 5일 봉환되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에 안장됐지만, 원래 자리에는 석판(石板)이 남아 있다.

    만국공묘의 임정 요인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오는 데는 광복 후 다시 40년의 세월이 걸렸다. 중국과 한국의 적대관계가 큰 원인이었지만, 임정이 우리 역사에 제대로 자리잡는 것이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하다. 임정의 역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밝혀져야 하고, 기본 자료도 충분히 수집되지 못한 실정이다. ‘임정기념사업회’는 2004년에야 출범했다. 광복 60주년이 되는 2005년은 온 국민이 임정에 대해 좀더 많이, 제대로 아는 한 해가 되기를 바라며 어두워지는 묘역을 뒤로 했다. 글·사진/상해·가흥·중경=이선민기자

    (블로그)smlee.chosun.com

    <그래픽> 대한민국 임시정부 이동로

    ■‘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는 중국의 인명·지명을 현지 발음 대신 독자의 귀에 익은 우리 발음으로 표기합니다. 제자(題字)는 중경 연화지 임정청사에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인 글자들을 반대 방향으로 배열해서 만들었습니다.

    기고자 : 이선민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2733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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