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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1부 (2) “의친왕을 망명시켜라”
‘義親王 상해행’ 반대하는 심복들을 재갈물려 옆방에 가둬
    한시준

    발행일 : 2005.01.12 / 특집 A1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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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말, 중국 상해의 언론은 한국 황태자 망명 실패로 확 달아올랐다. 한국의 황태자가 상해로 망명을 시도하였다가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연거푸 지면을 채웠다. 사건의 주인공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李堈·1877~ 1955)이었다. 비밀리에 서울을 떠난 그는 압록강 건너 중국 안동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의친왕의 탈출, 그것을 추진한 것은 임시정부였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11일, 민족을 대표하는 기구이자, 독립운동을 이끌어 갈 최고기관으로 중국 상해에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그러나 상해와 국내는 너무 멀었고, 정부와 국민은 멀리 떨어져 있었다. 임시정부에는 일제 치하의 국민들에게 임정의 존재를 알리고, 유기적 관계를 맺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상해와 한국을 연결하기 위해 만든 것이 연통제와 교통국이란 체제다. 일종의 행정조직인 연통제와 통신연락 기구인 교통국을 주도한 것은 당시 내무총장 안창호(安昌浩)였다. 연통제를 통해 국내의 각 도와 군·면 단위까지 책임자를 임명하고, 이들로 하여금 ‘정부’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연통제와 교통국은 정부와 국민, 상해와 국내를 연결시키기 위한 제도였다. 이러한 제도를 운영하기 위해 둔 것이 ‘특파원’이었다. 특파원의 역할은 특수 임무를 부여받고, 그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특파원들의 다양한 활동 중 하나가 유력인사를 상해로 탈출시키는 일이었다. 첫 사업은 10월 말 성사됐다. 3·1운동 직후 국내에서 비밀결사로 조직된 조선민족대동단(朝鮮民族大同團) 총재 김가진(金嘉鎭)이 상해로 와서 임정에 합류했다. 한말 농상공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충청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고, 합병 후에는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던 ‘거물’이 탈출한 것이다.

    안창호는 김가진을 망명시키기 위해 특파원 이종욱을 파견하였다. 승려 출신인 이종욱은 세 번이나 국내에 잠입해 임무를 완성하고 돌아간 베테랑이었다. 대동단의 협조하에 김가진의 탈출을 추진한 이종욱은 1919년 10월 30일 김가진과 함께 상해에 도착하였다. 김가진의 망명은 극비리에 이루어졌다. 그의 집안 식구들조차 나중에 신문을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김가진의 탈출과 임시정부 합류는 일제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남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은 인물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고 하는 자체가 일제로서는 수치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총독부 경무국에서는 김가진을 다시 데려오고자 상해로 공작원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임시정부에서는 그 공작원을 체포, 처형하였다.

    김가진에 이어 추진한 것이 의친왕 탈출이었다. 임시정부는 김가진의 탈출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의친왕도 망명할 뜻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의친왕은 1894년 청일전쟁 종전 후 일본에 보빙대사(報聘大使)로 간 것을 비롯해서 유럽 여러 나라를 특파대사로 방문했고, 1900년부터 5년간 미국에 유학해 왕실 인물 중 가장 국제 정세에 밝았다.

    일제의 삼엄한 경비를 받고 있었던 의친왕의 탈출 역시 대동단과 연계하여 시도됐다. 마침내 임정과 연계된 대동단원 전협이 1919년 11월 9일 밤, 종로구 공평동의 비밀가옥에서 의친왕과 접촉하는 데 성공했다. 의친왕에게 상해로 가 임시정부에 합류할 것을 권고하였다. 심복들이 반대하자, 재갈을 물려 옆방에 감금해 버렸다. 망설이던 의친왕이 상해행을 응낙했다. 의친왕은 선왕에게 받았던 채권증서와 비밀문서를 가져간다고 하였고, 이를 가져오는 데 시간이 걸렸다. 11월 10일 밤, 의친왕은 허름한 옷으로 변장하고 수색역에서 안동행 기차에 올랐다.

    그러는 동안, 의친왕의 탈출은 일제 경찰에 감지되었다. 의친왕이 잠적하자 경찰에 비상이 걸렸고, 수완이 뛰어나다고 알려진 한인 형사 김태석이 투입되었다. 3등칸에 탔던 의친왕은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 도착하였다. 안동에서 이륭양행이 운영하는 배를 타고 상해로 갈 계획이었다. 그러나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를 빠져나갈 때, 이를 지키고 있던 일제 경찰에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망명이 좌절된 후, 의친왕은 임시정부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가 상해에서 발행되는 중국신문인 ‘민국일보(民國日報)’의 1919년 12월 4일자에 ‘한국 태자의 일본에 대한 반감[韓太子對日之反感]’이란 제목으로 보도되었다. 이 편지에서 의친왕은 “나는 차라리 자유 한국의 한 백성이 될지언정 일본 정부의 한 친왕(親王)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을 우리 한인들에게 표시하고, 아울러 한국 임시정부에 참가하여 독립운동에 몸바치기를 원한다”는 것을 비롯하여, 자신이 탈출하고자 했던 목적 네 가지를 밝혔다.

    특파원을 통한 활동은 중요한 경험이 되었고, 임시정부는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1920년 3월에 창설한 지방선전부가 그것이다. 지방선전부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국내에 대한 각종 정보 활동을 총괄하기 위해 조직한 임시정부의 정보기구였다. 임시정부가 국내의 국민들과 연계하여 활동하고자 한 시도와 노력은 이처럼 다양했다.

    한시준

    단국대 사학과 교수

    기고자 : 한시준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195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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