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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1부 (3) 열강의 지지를 확보하라
親美 이승만, 구미열강 냉대속 러시아와 차관교섭 희망
    고정휴

    발행일 : 2005.01.19 / 특집 A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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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년 12월 중국 상해에 ‘러시아 장성’ 포타포프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한제국 말기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관의 무관으로 근무했던 그는 고종 황제와 조정 대신들과 가깝게 지냈다고 했다. 그는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공을 세워 니콜라이 2세로부터 최고훈장을 받았으나, 1917년 2월혁명이 일어나자 친위대 병력을 동원하여 차르체제를 붕괴시키고 공화국의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러나 1918년 2월 왕당파인 콜차크 제독의 주도하에 추방당한 그는 일본에 망명했고, 거기서도 축출되자 상해로 왔다고 했다.

    포타포프는 임시정부의 대변지인 ‘독립신문’과 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포타포프는 “내가 귀국(貴國)에 체류할 때에 일본에게 강탈을 당하는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전력을 다하였다”면서 “이제는 민족자결·민족평등의 대세 중에 처한 러시아 혁명당의 영수로서 대한민족의 장래에 대하여 어찌 수수방관할 수 있으리오. 나는 귀국의 독립운동에 참가하기를 약속하노라…이 뜻을 경애하는 귀 국민에게 고하기를 희망하노라”고 말했다.

    포타포프의 출현으로 임정은 모스크바 특사 파견을 논의하게 됐다. 이 문제를 놓고 국무총리 이동휘와 노동국 총판 안창호 사이에 협의가 오고 갔다. 1918년 5월 시베리아의 하바로프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결성했던 이동휘는 신흥 소비에트 러시아와 제휴함으로써 한국 독립을 달성하자고 했다. 임정 내 온건파 지도자인 안창호는 이 무렵 한·중·러의 ‘3국 연맹’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듬해 1월 22일, 임정 국무회의는 안공근·여운형·한형권 3인을 모스크바 외교원으로 선정했다. 그러나 이동휘는 노령(露領) 한인들의 인심을 수습하기 곤란하다는 이유로 여운형 파견을 반대했다. 안창호가 추천한 안공근은 당시 시베리아에 체류하고 있어 연락이 되지 않았다. 결국 한인사회당 간부인 한형권만이 임정 특사로 모스크바에 파견되었다.

    한형권은 몽골과 시베리아를 거쳐 1920년 5월 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그는 ‘소비에트 주권에 처음 온 외국손님’으로 국빈 대우를 받았다. 소비에트 정부의 수상인 레닌과 외무인민위원장 치레린, 아시아 외교 담당 카라한 등을 만날 수 있었다. 한형권은 이때 4개 항의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1)노농(勞農) 러시아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2)한국 독립군의 장비를 적위군(赤衛軍)과 똑같이 충실하게 하여 줄 것 (3)독립군 지휘관을 양성하기 위한 사관학교를 시베리아에 설치하여 줄 것 (4)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원조하여 줄 것 등이었다.

    해방 후 한형권의 회고에 따르면, 소련은 이때 자신의 요구 조건을 모두 들어주었다고 했다. 당시 일본은 ‘대일한로공수동맹(對日韓露攻守同盟)’이 체결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실제 소련은 임정에 금화 200만루블의 자금 지원을 약속했고, 제1차로 40만루블이 상해에 유입되었다. 소련은 그처럼 한국 임시정부의 존재를 인정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한 최초의 국가였다.

    그 무렵 소련은 동방의 식민지 약소민족들을 지원함으로써 제국주의 열강과 식민지의 연결고리를 끊어 놓으려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임정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도 소련과의 차관 교섭을 희망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의 상해 체류기(1920.12 ~1921.5)에 작성된 ‘차관조건’이라는 문건을 보면, 차관 총액을 200만달러 이상으로 하고 이자는 연 4푼 내지 6푼이며 담보로는 독립 후 한국에서의 철도부설권, 광산채굴권, 관세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 차관 목적은 군사비와 외교선전비 그리고 기업자본 조달이었다. 상환기간은 독립완성 후 5개년으로 정했다. 이 문건에서 차관 대상국이 명시되지는 않았지만, 이승만은 일차적으로 소련을 염두에 두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1921년 5월 이승만이 이끌던 임정에서 이동휘가 소련에 보낸 한형권을 즉시 소환하고 그 대신 이희경과 안공근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동휘는 1921년 초 이승만에게 임정의 대통령제를 위원제로 변경하자는 안을 제시했다가 거부당하자 국무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동휘의 사임으로 임정은 대소(對蘇) 교섭의 창구를 바꾸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승만이 신내각과 차관 계획을 짜고 있을 때 레닌 정부가 약속한 자금 가운데 일부는 이미 상해로 유입되고 있었다. 이 자금은 주로 이동휘가 이끄는 한인사회당과 상해파 고려공산당의 활동 경비로 사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궁금증을 갖게 된다. 왜 친미(親美) 외교노선의 대표적 인물인 이승만이 소련과의 접촉을 시도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유는 구미(歐美) 열강의 냉대였다. 미국이나 영국·프랑스는 한국의 독립은 물론 임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한국 문제를 시종 일본의 내정 문제로 간주했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1905년의 ‘을사조약’에 의하여 한국은 국제적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3·1운동을 전후하여 한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파리강화회의(1919. 1.12~6.28)에서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은 어디까지나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된 것이었다. 승전국 일본은 일약 5대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한국의 독립문제는 거론조차 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일시적인 ‘외교적 계책’으로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을 당분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하에 두어달라는 청원서를 보냈다가 국내외 민족운동세력들로부터 호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고정휴 포항공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기고자 : 고정휴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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