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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1부 (4)초기 臨政을 이끈 사람들
    반병률

    발행일 : 2005.01.26 / 특집 A8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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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임정을 이끈 세 인물은 대통령 이승만(1875~1965), 국무총리 이동휘(1873~1935), 노동국 총판 안창호(1878~1938)였다. 이들은 임시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였기 때문에 당시 임정은 ‘삼각정부(三脚政府)’라 불렸다. 이들 세 지도자의 결합은 임정이 지닌 이념적인 좌우합작과 지역적인 연합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이들 세 지도자는 출신 배경, 독립운동 노선, 활동 기반, 국제관계에 대한 인식, 리더십 스타일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크게 대비되었다. 이승만은 황해도 평산 출생의 몰락한 왕족 후예였고, 이동휘는 함남 단천의 한미한 아전 집안 출신이었으며, 안창호는 평남 강서의 평범한 농민 출신이었다. 그리고 이승만과 달리 이동휘와 안창호는 전통적인 차별 지역인 함경도·평안도의 평민 출신이었다.

    이 같은 지역적·신분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들 간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조선왕조 말기에 태어난 민족운동 제1세대로서 어린 시절 유학을 공부했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적극 수용했다. 하지만 1910년 나라가 주권을 상실한 이후 이들 세 지도자의 세력 기반과 독립운동 노선의 차이는 뚜렷해졌다. 이승만은 미국 하와이를 근거로 활동했고 미국식 공화제를 선호한 친미(親美) 외교론자였다. 안창호는 미주 서부지역을 활동 무대로 삼았고 역시 공화제를 선호했으나 외교에 의한 독립 달성에는 회의적이었다. 그는 실력 양성을 통해 독립전쟁 준비를 추구했다. 이동휘는 러시아와 북간도 지역을 지지 기반으로 하였고 사회주의자로 전환한 이후에는 신흥 소련 정부의 지원과 협력을 바탕으로 무장투쟁에 의한 독립 달성을 목표로 했다.

    정치 이념적으로 보면 이승만과 안창호는 우파, 이동휘는 좌파에 속했다. 세 사람은 모두 주권을 찾고자 노력한 독립운동가였지만, 이승만은 권력 지향의 정치가, 안창호는 조직 관리에 능한 조직가, 이동휘는 현실타파형의 혁명가였다.

    이들 세 사람은 통합된 임시정부에 대한 입장을 달리했다. 안창호와 이동휘는 통합 임정을 전폭적으로 승인했지만, 이승만은 ‘한성정부’의 법통을 주장하며 통합 임정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유보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했다.

    통합 임정 출범 초기에 이동휘와 안창호는 동지적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정국을 주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19년 11월 중순 여운형의 도일(渡日) 문제를 둘러싸고 두 사람 간에 이견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1920년 1월 말 한형권·여운형·안공근을 모스크바 특사로 선정한 것도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결과였다. 곧이어 이동휘와 안창호는 이승만과 이동녕·신규식·이시영 등 기호파 총장들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임정은 1920년 2월 26일 구미위원부가 재무부 산하의 미주 지역 재무관서 기능을 갖게 하고, 그 위원인 서재필을 재무관에 임명했다. 아울러 안창호가 이끄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가 실시해온 애국금 제도를 폐지함과 동시에 구미위원부가 독립공채 발행 권한을 갖도록 했다. 이는 이동휘와 안창호에 대한 이승만의 정치적 승리였다.

    이제 이승만이 구미위원부의 공채 발행을 통해 미주지역의 재정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고 국내로부터의 자금도 단절되면서, 임정은 몇 달째 집세도 못 낼 정도의 재정궁핍 상태에 빠졌다. 재정 독점과 임정 활동 부진의 책임이 이승만에게 있다고 판단한 국무총리 이동휘와 6명의 국무원 비서장·차장들은 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신임 운동을 개시하였다. 이들의 목표는 이승만의 축출과 임정 개혁이었다. 이동휘는 위임통치 청원을 골자로 한 이승만 불신임 이유서와 국무총리 사퇴서를 제출하고 6월 22일 북중국의 위해위(威海衛)로 떠났다. 김립(국무원 비서장) 윤현진(재무차장) 이규홍(내무차장) 김철(교통차장) 등도 동맹 사직을 시도했지만, 현상 유지와 이승만 퇴진 불가를 주장한 안창호의 사직 위협에 밀려 좌절되었다.

    이동휘는 사퇴서 제출 1개월20일 만인 8월 11일 국무총리직에 복귀했다. 이동휘가 사직을 번복하고 복귀하게 된 이유는 상해에 온 국제공산당 파견원 보이틴스키의 권고였다. 보이틴스키는 소련 정부와의 차관 교섭을 위해서는 임정 국무총리 명의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것이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이제 이동휘는 이승만과 안창호의 협력에 연연하지 않고도 모스크바 자금을 바탕으로 한 무력 양성과 소련 적군과의 제휴로 일본과의 최후 결전을 실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20년 가을 서·북간도 한인 사회에 대한 일본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경신참변(간도사변)은 임정에 대한 격렬한 비판을 불러일으켰고, 이동휘측과 안창호측은 치열한 급진론·준비론 논쟁을 교환했다. 이동휘는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등 급진론과 전면적인 임정 개혁을 주장했고, 안창호는 이에 맞서 실력준비론을 설파했던 것이다.

    미주로부터 태평양을 건너온 대통령 이승만이 처음으로 참석한 가운데 1921년 1월 5일 이후 3차례 개최된 국무회의에서 이동휘와 다른 간부들 사이에 그동안 심화되어 온 노선 갈등이 분출되었다. 특히 이동휘와 이승만은 격렬한 논쟁을 주고받았다. 이동휘는 3·1운동 직전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청원한 이승만의 책임을 추궁하며 대책 수립을 요구했고, 대통령 1인이 주권을 행사하는 대통령제의 폐지와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의 개혁을 제기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동휘의 공격을 무시했고, 다른 국무위원들 역시 이동휘의 임정 쇄신안에 반대했다.

    1921년 1월 24일 마침내 고립된 이동휘가 임정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통합 임정은 파국을 맞았다. 이동휘의 사임은 참모총장 겸 총사령관 유동열(4월 15일), 학무총장 김규식, 교통총장 남형우(4월25일)의 연속 사임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5월 11일 안창호마저 임정을 떠남으로써 통합 임정은 출범 1년 반 만에 와해의 위기에 빠지게 됐다. 반병률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

    기고자 : 반병률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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