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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2부 (3)근대 정당이 만들어지다
韓獨黨·국민당 등 잇따라 창당…민주공화제 첫 실험
    한시준

    발행일 : 2005.03.23 / 특집 A2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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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에서 민주공화제를 정착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큰 의미를 갖는다.

    1910년에 멸망한 대한제국은 전제군주제였다. 9년 후인 1919년에 수립된 임시정부는 민주공화제를 채택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을 계기로 전제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바뀌는 민족사의 대전환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가 27년 동안 이를 발전시켜 오면서, 민주공화제가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민주공화제가 정착 발전되는 데는 두 개의 축이 있었다. 하나는 임시의정원이었다. 의정원은 요즘 국회와 똑같은 역할과 기능을 담당한 기구였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곳이 의정원이었다. 의정원은 1919년 4월 10일 구성되었다. 여기서 헌법인 ‘임시헌장’을 제정 통과시키고, 4월 11일 임시정부를 조직한 것이다. 이후 의정원은 행정부인 임시정부와 더불어 입법기구로 역할하였다.

    민주공화제를 발전시킨 또 하나 요소는 ‘정당’이었다. 1930년 1월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이 창당되었다. 이동녕·안창호·조소앙·김구 등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인사들이 결성한 것이다. 한독당은 임시정부의 기초세력이자 전위조직이었다. 그리고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며 여당과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광복을 맞아 환국할 때까지 정당을 중심으로 유지 운영되었다.

    정당이 결성되면서, 독립운동전선에 변화가 일어났다. 독립운동자들이 정치세력화한 것이 변화의 하나였다. 정치적 이념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졌고, 정당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이 재편된 것이다. 독립운동의 이념과 목표가 분명하게 설정된 것도 주요한 변화였다. 독립운동은 일제에 빼앗긴 국토와 주권을 되찾아 새로운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데 목표가 있었지만, 독립 후 어떠한 국가를 건설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았다. 그런데 정당이 결성되면서, 그 당의(黨義)와 당강(黨綱)을 통해 이를 명확하게 천명한 것이다.

    임시정부가 광복 후 건국 원칙을 정립한 것도 한독당을 결성한 후였다. 한독당은 정치이념으로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수용하였다. 삼균주의는 조소앙이 창안한 것으로,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의 균등을 실현하고, 이를 토대로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와의 균등을 이루며, 나아가 세계일가(世界一家)를 추구한다”는 것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독당은 이를 정치이념으로 채택하고, 당의에 “혁명적 수단으로써 국토와 주권을 완전히 광복하여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에 기초한 신민주국을 건설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삼균주의에 기초한 신민주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한독당의 목표였다. 임시정부도 이를 건국 원칙으로 정립하여, 1931년 4월 대외선언을 통해 처음으로 밝혔다.

    한독당을 비롯한 근대 정당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임시정부가 상해를 떠나 중경에 이르기까지의 ‘이동시기’였다. 이들은 무엇보다 통일을 추진하면서 성장 발전하였다. 정당의 통일운동은 1932년부터 추진되었다. 대일(對日) 전선을 통일하자는 취지 아래 각 정당을 하나로 통일하자고 한 것이다. 한독당과 의열단을 비롯하여 5개 정당이 이에 참여하였고, 이들은 각각 정당을 해체하고 새로운 당을 결성한다는 데 합의를 이루었다. 그리고 1935년 7월 통일정당인 민족혁명당을 결성하였다. 1930년을 전후하여 창당된 정당들이 하나로 합류하여 민혁당을 결성한 것이었다.

    민혁당의 성립은 독립운동전선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기존의 임시정부와 한독당에 실려있던 무게 중심이 민혁당으로 옮겨간 것이다. 5개 정당이 통일을 이루어 대규모 세력을 형성하였다는 점도 있었지만, 임시정부를 옹호 유지하고 있던 한독당이 당을 해체하고 민혁당에 참여한 것이다. 당뿐만 아니었다. 임시정부 국무위원 중에서도 7명 중 5명이 민혁당에 참여하였다. 이로써 임시정부는 존립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민혁당으로 통일을 이루었지만, 오래가지 못하였다. 다시 여러 정당이 생겨난 것이다. 우선 민혁당에 참여하지 않은 김구를 비롯한 인사들이 새로이 정당을 결성하였다. 한국국민당이었다. 김구는 이동녕·송병조·차이석 등과 함께 1935년 11월 국민당을 창당, 무정부 상태에 빠진 임시정부를 수습하였다. 이후 임시정부는 국민당에 의해 유지 운영되었다. 민혁당에 참여하였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탈당, 정당을 결성하기도 하였다. 조소앙과 홍진이 탈당하여 해체된 한독당을 재건하였고, 이청천·최동오 등도 탈당하여 조선혁명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민혁당으로 합류하였던 정당이 다시 분열되어 여러 정당이 생겨나게 되었다.

    1939년 좌우 양 진영의 정당 및 단체를 통일하려는 시도가 또 한 차례 있었다. 임시정부를 비롯한 중국 관내(關內) 독립운동 세력들이 기강(江)에 집결하게 되면서, 김구와 김원봉이 양 진영을 대표하여 통일을 이룬다는 원칙에 합의를 이루었다. 이에 따라 좌우 양 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이 참여한 7당 통일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러나 통일의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이 대립하였고, 결국 통일회의는 결렬되고 말았다.

    통일운동은 결렬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각 정당의 정치적 이념이나 독립운동 목표에 절충이 이루어졌고, 그 성과가 나타났다. 1940년 5월 민족주의 계열의 3당이 임시정부 옹호 유지를 전제로 통합을 이루어 새로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한 것이다. 이어 좌익진영의 정당 및 단체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1942년 민혁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의 인사들이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되어, 의정원에 참여한 것이다.

    좌익진영의 정당과 단체들이 참여하면서, 그동안 한독당 중심으로 운영되던 의정원의 운영 형태가 달라졌다. 일당(一黨) 체제에서 다당(多黨) 체제로 바뀐 것이다. 여당과 야당도 생겨났다. 한독당이 여당으로, 좌익 진영의 정당과 단체가 야당으로 역할하였다. 다당 체제의 성립, 그리고 여당과 야당에 의한 의정원의 운영은 의회정치의 새로운 경험이었다. 의정원과 정당을 통한 이러한 경험은 한국의 정당 발달 및 정당 정치의 기원을 이룬 것이었고, 민주공화제를 발전시키는 주요 원동력이 되었다. 한국 정당의 뿌리는 한독당에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시준 단국대 교수

    <그래픽>1930년대 임정을 둘러싼 정당 흐름

    기고자 : 한시준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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