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2부 (4)군사활동의 터전을 일구다
1934년 韓·中함께 군관학교 설립… 광복군 모태<母胎>로
    한상도

    발행일 : 2005.03.30 / 특집 A19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김구는 1933년 봄 남경의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서 국민당 정부의 최고지도자 장개석 군사위원회 위원장과 만났다. 윤봉길 의거의 배후로 지목되어 상해를 탈출한 후 가흥에 은둔하던 때였다.

    김구는 군사 인재 양성을 위한 지원을 요청했고, 그 결실로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洛陽分校)에 한인(韓人)특별반이 개설됐다. 1934년 초 중국 국민당의 진과부·진립부 형제를 중심으로 하는 최대 계파인 ‘CC파’의 지원하에 설치된 한인특별반의 정식 명칭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제2총대 제4대대 육군군관훈련반 제17대’였다.

    상해를 출발하여 중경에 정착할 때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이동기는 고난과 역경의 시기였지만, 이처럼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연대 등을 배경으로 항일전선을 재정비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임정이 전면에 나설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중국측의 지원은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金九)와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을 상대로 전개됐고, 두 사람은 향후 독립운동의 동량이 될 군사인재 양성에 착수했다.

    김구가 설립을 주도한 중국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한인특별반의 교육 목표는 “일본 제국주의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노동자·농민을 지휘할 수 있는 독립운동 간부를 양성하는 것”이었다. 운영은 김구가 총괄했으며, 안공근·안경근·노종균 등이 실무를 맡았다. 훈련은 총교도관 이청천과 오광선·이범석·조경한 등 이전에 만주에서 활동한 한국독립군(韓國獨立軍) 간부들이 담당하였다. 92명의 입교생에게는 피복 등의 군수품과 매월 12원(당시 쌀 세 가마 값에 해당)의 급여가 지급됐으며, 비밀 유지를 위해 엄격히 통제됐다.

    이들은 김구가 모집한 한인 청년을 주축으로, 만주사변 이후 남경으로 이동해 온 전 한국독립군 대원들, 간부학교 2기생 일부, 남화(南華)한인청년연맹 대원 약간 명 등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한국독립군 간부와 대원의 동참은 만주 지역에서의 군사활동이 중국 관내(關內) 지역으로 무대를 옮겼고, 군사활동 노선을 중시하는 독립운동 세력이 연합했음을 의미했다. 1935년 4월 9일 졸업과 함께 이들은 여러 갈래로 흩어졌다. 한국독립군 출신 졸업생들은 신한독립당 산하 청년군사간부특별반으로 편제됐으며, 의열단 계열의 졸업생들은 민족혁명당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그리고 김구 휘하의 졸업생들은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수용되었다.

    1934년 12월 하순 결성된 한국특무대독립군(韓國特務隊獨立軍)의 본부는 남경 목장영(木匠營) 고강리(高崗里) 1호에 소재했으며, ‘김구구락부’로도 불렸다.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와 중앙대학 등에 재학 중인 김구 계열의 청년들도 수시로 이 곳에 집결하여, 세계 정세 및 혁명운동에 관한 정신교육 등을 받으며 조직화를 꾀했다. 대원들은 김구가 쓴 ‘도왜실기(屠倭實記)’를 읽거나, 3·1운동 때 한인학살 사진 및 태극기를 배경으로 촬영한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사진 등을 보며 항일 의지를 다듬었다.

    김구는 또 1935년 2월부터 한인 청년을 수용·교육시키는 학생훈련소를 운영했다. 위치는 남경 동관두(東關頭) 32호였고, ‘특무대예비훈련소’또는 ‘몽장훈련소(蒙藏訓練所)’로 불렸다. 대원들에게는 매월 10원의 급여가 지급됐고, 오전 7시부터 오후 10시까지 중국어·기하·대수 등의 학과 교육과 정신 교육을 받았다. 훈련소에는 조선일보·동아일보·대판매일신문(大阪每日新聞)·대공보(大公報)·화보(華報) 등의 신문과 신동아·신조선 등의 잡지, 각종 도서를 갖추어 면학을 독려했다.

    이들은 1935년 6월 22일 일제의 정보망을 피해 강소성 의흥현 장저진 용지산 속에 있는 징광사(澄光寺)로 이동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징광사와의 임대 계약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대원들은 다시 남경으로 이동하여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 등지에서 합숙했다. 이후 한국특무대독립군 및 학생훈련소 대원들은 한국국민당청년단으로 재편성된 다음 ‘통합’한국독립당과 한국광복군(韓國光復軍)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며 임정을 지키는 데 자신을 바쳤다.

    한편 김원봉은 1932년 가을부터 국민당 정부 군부 계통의 지원하에 남경 근교에서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이하 간부학교)를 운영했다. 황포군관학교 4기 졸업생이기도 한 그는 황포동학회(黃捕同學會) 및 비밀첩보기구인 삼민주의역행사(三民主義力行社)와 제휴하여 간부학교를 설립했다.

    ‘중국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간부훈련반 제6대’가 정식 명칭인 이 간부학교는 의열단의 대중투쟁 노선을 선도할 중견 군사·정치 간부의 양성을 교육 목표로 표방했다. 1932년 10월부터 1935년 9월에 이르는 3년여의 기간에 걸쳐, 근대적인 군사 지식과 훈련으로 단련된 130여명(1기생 26명, 2기생 55명, 3기생 44명)의 ‘청년투사’를 배출했다.

    김구와 김원봉은 이미 이 무렵부터 군사활동에서 공조했다. 일제의 정보 자료에 따르면 1934년 4월경 김구가 간부학교 2기생 교육 상황을 살피러 와서, 김원봉의 소개를 받은 다음 “최후의 승리와 안락이 다가오고 있으며, 일본과 소련의 전쟁이 시작될 때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졸업 후에도 제군들은 혁명을 위하여 끝까지 분투하기 바란다”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그러고는 학생들에게 ‘별에 태극기 모양을 넣은 클립이 달린’ 애국 만년필을 한 자루씩 선물로 주고 돌아갔다고 한다.

    당시는 일제의 대륙 침략이 본격화되고 만주 지역에서 독립군의 활동 여건이 악화되어 가던 상황이었다. 이런 가운데 한·중 국제연대를 배경으로 설립된 중국육군군관학교 냑양분교 한인특별반과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등 군사간부 양성기관, 한국특무대독립군·학생훈련소 및 청년군사간부특별반이라는 수용·훈련시설의 존재는 이동기 임정의 취약한 지도력을 보완해 주었을 뿐 아니라 한국광복군의 인적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매주 중요했다. 아울러 이는 임정의 이동기가 덧없이 흘러버린 ‘방랑의 시기’가 아니라, 중경(重慶)에서 재도약할 수 있는 밑받침이 될 군사인재를 양성·단련시킨 귀중한 시간이었음을 알려준다.

    한상도·건국대 교수

    기고자 : 한상도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2401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