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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3부 (2)임시정부의 국군, 광복군
중국내 무장조직 대통합… 새 조국의 國軍을 꿈꾸다
    한상도

    발행일 : 2005.04.13 / 특집 A2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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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9월 15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겸 한국광복군 창설위원회 위원장 김구’는 광복군 창설을 공포하고, ‘한국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 선언문은 광복군의 창군(創軍)이 “임정의 군사조직법에 의거하여” “우리의 전투력을 강화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고 밝히고, 대일(對日) 연합군의 자격으로 항전할 것을 천명했다. 이어 9월 17일에는 중경(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창건식이 거행됐다. 이청천 총사령과 이범석 참모장이 이끄는 10개 처(處)와 2개 대(隊)로 총사령부를 조직하고, 그 밑에 3개 지대(支隊)를 두었다.

    광복군의 창건은 독자적인 군대를 조직하여 독립전쟁을 수행한다는 임정 수립 이래 오랜 목표가 성취된 것이었다. 임정은 이를 위해 이동기의 역경 속에서도 군사위원회를 발족시켰고, 군사특파단을 파견하여 모병(募兵)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0년 초에는 미주 한인(韓人) 사회에 광복군 창건을 위한 재정 지원을 요청하였으며, 그들의 성원은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식을 거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광복군은 먼저 중국에서 활동하던 한인 군사조직의 통일을 추진했다. 첫 번째로 1939년 11월 무정부주의 계열의 청년들이 중심이 돼 만든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1941년 1월 1일 광복군의 5지대로 편입됐다. 이어 1942년 7월에는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의용대의 총부 및 1지대가 광복군 1지대로 재편성됐다. 광복군에 2년 앞서 결성되어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있던 조선의용대 병력의 합류는 임정과 광복군의 대표성을 강화시켜 주었다.

    이로써 광복군은 중국 관내(關內) 지역에서 활동하는 한인 무장부대의 통합 조직이 됐다. 그리고 이청천 총사령과 김원봉 부사령 밑에 1지대(지대장 김원봉, 본부:중경), 2지대(지대장 이범석, 본부:서안), 3지대(지대장 김학규, 본부:부양)와 제3전구공작대·제9전구공작대·토교대(土橋隊)의 진용을 갖추었다.

    광복군의 활동은 크게 모병(募兵)과 선전(宣傳)으로 나눌 수 있다. 모병 활동을 위해 대동(大同)·포두(包頭)·상요(上饒)·서안·부양 등지에 징모(徵募) 분처가 설치됐고, 서안과 부양에는 각각 한국청년훈련반과 한국광복군훈련반이라는 임시훈련소를 운영했다. 또 기관지 ‘광복(光復)’(국·한문판과 중국어판)을 발행하고, 중국 국제방송 및 연극 공연 등을 통해 국내외 동포와 중국인 및 국제 사회를 상대로 선전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광복군의 활동은 큰 난관에 봉착했다. 이는 광복군의 성격과 지위를 둘러싼 한·중 간의 갈등 때문이었다. 중국 정부는 광복군의 독자적인 조직을 허용하여 또 하나의 팔로군(八路軍)을 만들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광복군을 중국군의 지원군으로 삼으려 했다. 설상가상으로 1941년 상반기에 조선의용대의 일부 병력이 중국 공산당 관할 구역으로 이동해버린 사건이 발생했다. 장개석은 참모총장 하응흠(何應欽)에게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를 중국군사위원회에 예속시키고, 참모총장이 직접 장악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결국 양측의 적지 않은 신경전을 거쳐 중국인 군사참모와 정치지도원을 받아들이고 중국 군사위원회의 통제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중국 정부가 광복군의 창건을 인정하고 활동을 허용한다는 절충이 이루어졌다. ‘한국광복군 활동 9개 기준(韓國光復軍行動9個準繩)’은 바로 이런 방침을 구체화한 것이었다.

    이후 광복군은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임정이 1944년 중반 ‘9개 기준’의 실효(失效)를 선언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중국측은 할 수 없이 8월 23일 김구에게 ‘9개 기준’의 취소를 통보했다. 이에 임정은 10월 7일 중국측에 원조를 보장하는 군사협정의 체결을 요구했다. 양국은 협상 끝에 1945년 4월 ‘한국광복군 지원 방안’에 합의했다. 일체의 군비(軍費)는 협상 후 차관의 형식으로 임정에 제공한다, 광복군의 경상비는 매월 임정에 지급한다, 한국인 포로는 감화를 거쳐 광복군에 인계한다는 내용이었다.

    1945년 8월 일제의 항복이 임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8월 11일 임정은 2지대장 이범석을 총지휘관으로 하는 3개 지구대의 국내정진군(國內挺進軍)을 편성하고 한반도 진입을 서둘렀다. 8월 16일, 선발대인 독수리팀을 태운 미군 비행기가 한반도로 향했지만 “가미카제 특공대가 아직 연합군을 공격하고 있다”는 무전을 입수한 미군 비행기는 기수를 돌렸다. 18일 다시 국내 진입을 시도하여 서울 여의도비행장에 착륙하였으나 이번에는 일본군의 저항에 부딪혀, 이튿날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후 임정은 10만명의 광복군을 편성하여 ‘국군’의 자격으로 귀국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북경·남경·상해 등지를 무대로 일본군에 소속되었던 한인 병사들을 편입시켜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오광선(吳光善)을 국내지대장으로 임명하여 파견했다. 서울 동대문 밖에 광복군 국내지구사령부가 설치되었고, 대전에는 한국광복군 경비대훈련소가 개설되었다. 그리고 대한국군준비위원회가 조직되어, 광복군 본대가 환국한 후 국군으로 발족하는 데 필요한 준비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환국할 수밖에 없었듯이, 광복군 국내지대도 미군정의 ‘사설 군사단체 해산령’에 의해 해체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조국으로 돌아갈 길이 막혀버린 광복군은 1946년 5월 16일 중국 국공내전(國共內戰)의 혼란 속에서 해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한상도·건국대 교수

    기고자 : 한상도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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