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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3부 (3)美·中의 승인을 위한 戰時외교
對日 연합군에 참여, 독립국 지위 얻길 바랐지만…
    고정휴

    발행일 : 2005.04.20 / 특집 A23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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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은 하와이의 진주만에 정박하고 있던 미 제7함대와 군사시설을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미국은 이날을 ‘치욕의 날’로 선포하고 일본과 그 동맹국인 독일·이탈리아에 대하여 선전포고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아시아전선과 유럽전선을 하나로 통합시켰다. 이듬해 1월 1일에는 미국·영국·소련·중국·캐나다 등 26개국의 ‘연합국 선언’이 발표되면서 이른바 반(反)파시즘 연합전선이 형성되었다.

    중경의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태평양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곧바로 국무회의를 개최하여 “본 정부도 3000만 인민을 동원하여 민주국 및 반(反)침략 진선(陣線)에 참가하여 공동분투할 것”을 결의했다. 12월 10일에는 주석 김구와 외무부장 조소앙의 명의로 ‘대일선전(對日宣戰)성명서’를 발표했다. 임정은 이 성명서에서 일본과의 합병조약 및 일체의 불평등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동시에 “한반도와 중국 및 서태평양에서 ‘왜구(倭寇)’를 완전 구축(驅逐)하기 위하여 최후승리까지 혈전(血戰)한다”고 선포했다.

    임정은 이러한 성명을 통하여 그들도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이렇게 되면 임정은 미국의 ‘무기대여법(Lend-Lease Act)’에 의하여 군수물자를 지원받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연합국들로부터 사실상의 승인을 획득하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 임정은 광복군 창설시, “만 1개년이면 최소한 3개 사단을 편성하여 중국·미국·영국 등 연합군의 교전단체로서 참가하고 국토 수복시까지 전투를 전개한다”는 계획을 세워 둔 바 있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은 이러한 계획을 실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포착되었다.

    임정의 전시외교는 중국 국민당 정부 및 중경에 있는 각국 공관을 상대로 전개되었다. 그 방법은 인적 접촉과 대회 개최, 성명서 등의 발표였다. 외무부장 조소앙이 이러한 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의 주장과 논리를 요약해 보면, (1)임정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망명정부로서 한국민을 대표하고 있다 (2)광복군을 비롯한 한인 무장집단은 대일전쟁에서 실질적인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3)전후(戰後) 한국은 아무런 조건 없이 즉각 독립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미국의 워싱턴DC에서는 주미(駐美)외교위원부의 위원장인 이승만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의 정계·언론계·학계 및 종교계 인사들로 구성된 한미협회와 기독교인친한회(親韓會)의 지원을 받으며 미 국무부·군부·정보기관들과 접촉했다. 1942년에는 3·1절을 맞이하여 백악관 바로 앞에 위치한 라파예트호텔에서 ‘한인자유대회(Korean Liberty Conference)’를 개최했다. 미국 각처에서 온 한인 100여명과 한미협회 임원들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한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미 대통령과 의회에 제출할 것 등의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대회 진행은 워싱턴의 WINX 방송을 통해 실황 중계되었다.

    이승만은 임정의 참전 외교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미주에서는 한인 청년들과 유학생들로 구성된 ‘자유한인부대’를 창설하고, 극동에서는 임정 산하의 광복군을 미군의 지휘체계 속에 편입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미 전략첩보국(OSS)과 접촉했다. 이승만은 이때 극동에서 2만5000명의 병력을 바로 동원할 수 있으며, 필요에 따라서는 5000명씩의 추가 증원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 문제로 연합국 열강 간에 갈등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전후(戰後) 동아시아에서 대두될 중국과 소련의 패권주의를 경계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미국은 전후 한국의 독립 대신 신탁통치 실시 방안을 내놓았고, 중국·영국·소련은 이에 원칙적인 동의 의사를 표시했다. 이리하여 1943년 12월 1일에 한국이 전후 ‘적절한 시기’에 독립될 것이라는 카이로선언이 나오게 되었다.

    카이로선언이 발표된 후 임정 주석 김구는 “만일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 끝에 한국에 무조건 자유 독립을 부여하기를 실패할 때에는 우리는 어떤 침략자나 또는 침략하는 단체가 그 누구임을 물론하고 우리의 역사적 전쟁을 계속할 것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외무부장 조소앙은 신탁통치의 명분으로 제시된 한국민의 자치능력 부족에 대하여, “세계 어느 사람이 특수한 권리를 가지고서 어느 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있고 어느 민족은 독립할 자격이 없다고 규정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없다. 만일 이런 사람이 있다면 이것은 곧 파시즘의 사상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 무엇인가”라고 반박했다. 이후 임정은 전후 한국의 즉각적이며 절대적인 독립을 요구했지만, 연합국 열강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임정의 전시외교가 벽에 부딪힌 이유는 인적·물적 기반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1940년대 초반 중경 거주 한국인은 300~400명 정도였다. 이들 대부분은 임정과 관계를 맺고 있던 독립운동가와 그 가족들이었다. 이들은 중국 정부로부터 거처와 생활필수품을 제공받았다. 미주(美洲) 한인사회로부터의 자금 지원은 임정 유지비로 충당되었는데, 이마저 1944년에 중단되었다. 따라서 임정은 재정적·군사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러한 상황은 임정의 승인 외교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대외적으로 임정은 중국에 종속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 태평양전쟁 발발 후 임정은 좌·우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하지만, 이는 중경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다. 미국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가 임정을 승인할 경우, 소련 또한 그들의 영향력하에 있는 조선인을 동원하여 임시정부를 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실 미국은 임정 승인 문제에 있어 소련의 반발을 가장 우려했다. 그것은 자칫 미국이 구상하는 대일 연합전선 구축에 균열을 가져올 뿐만 아니라 전후 동아시아의 안전보장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또한 미주 한인사회는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주미 외교부의 개조 문제로 분열되었다. 미국 국무부는 한인 그룹들에 대한 ‘공평한 대우’를 내세워 은근히 미주 한인단체 및 지도자들 간의 분열을 조장하고 필요한 정보를 얻어냈다. 그리고는 경쟁적인 한인 그룹 중 어떤 그룹도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중경의 미국대사관도 김구의 한국독립당과 김원봉의 조선민족혁명당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결국 이런 안팎의 요인들이 겹쳐서, 임정의 전시외교는 커다란 의욕을 가지고 시작됐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말았다.

    고정휴·포항공대 교수

    기고자 : 고정휴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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