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3부 (4)후기 임정의 주역들
김구 주석체제 강화… 左右통합후 40·50代 진출 늘어
    최기영

    발행일 : 2005.04.27 / 특집 A23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중경 시기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는 여전히 60대 이상의 독립운동 원로들이 상당수 있었지만, 점차 40~50대가 포진하기 시작했다. 특히 좌우 합작의 ‘통일전선 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런 현상은 두드러졌다. 1940년 10월 주석제가 채택되면서 김구가 주석, 이시영·조성환·조완구·조소앙·박찬익·송병조·차리석이 국무위원에 선임됐다. 이들은 대부분 여러 차례 국무위원을 역임한 한국독립당의 원로들이었다. 이어 1941년 12월 좌파 계열이 임시정부를 ‘혁명의 최고통일기구’로 인정하고 임시정부 참여를 결정했다. 그리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한국광복군 제1지대로 개편됐으며, 10월 임시의정원의 보궐선거와 국무위원의 증원으로 좌파 계열 인사들이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민족혁명당의 김규식·장건상, 민족해방동맹의 유동열, 한국독립당의 황학수가 국무위원에 추가됐다.

    또 1944년 4월 주석·부주석제가 확립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의 제정으로 임시정부는 본격적인 좌우 합작을 이루었다. 이에 따라 주석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박찬익·조소앙·조경한(이상 한국독립당) 장건상·성주식·김붕준·김원봉(이상 민족혁명당) 유림(무정부주의자연맹) 김성숙(민족해방동맹) 등이 선임됐다. 아울러 국무위원회 휘하의 행정부서 책임자는 조소앙(외무)·김원봉(군무)·조완구(재무)·신익희(내무)·최동오(법무)·최석순(문 ?·엄항섭(선전)이었고, 1945년 3월 문화부장이 김상덕으로 교체됐다. 임시의정원은 이같은 인선에 대해 “이번에 선출된 주석·부주석 및 국무위원은 우리 혁명운동사에서 가장 공헌이 많은 민족적 지도자들이며, 또 우리 민족의 각 혁명 정당의 권위 있는 지도자들이 연합 일치하여 생산한 전민족 통일전선의 정부”라고 평가했다.

    한편 임시의정원은 1942년 송병조의 별세로 홍진이 의장으로 선임됐다. 그리고 의정원 의원도 한국독립당이 절반, 좌파 계열과 무소속이 절반을 차지했다. 광복군은 1940년 창설 이래 이청천(지청천)이 총사령을 맡았고, 1942년 5월 조선의용대가 합류하면서 김원봉이 부사령에 임명되었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한국독립당이 주도하지만, 좌우 합작으로 운영되는 형태였다.

    중경 시기 임시정부를 이끈 것은 여전히 김구(1876~1949)였다. 그는 1940년 10월 주석에 선출되어 정부를 대표했고 임시헌장 제정 이후 그 권한은 더욱 강화됐다. 김구는 열강의 임시정부 승인, 광복군과 미국 OSS(전략첩보국)의 군사협력을 추진하는 등 군사력 증대에 진력했다. 또 국외 무장세력 간의 연대도 도모하고 있었다.

    김규식(1881~1950)은 선전부장을 거쳐 신설된 부주석을 맡았다. 한말(韓末) 미국에서 대학을 마친 그는 임시정부 초기 파리강화회의 대표와 구미위원부 위원장, 국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35년 민족혁명당의 주석으로 선임됐지만, 성도(成都)의 사천대학(四川大學) 교수로 재직하다가 다시 임시정부에 참여했다. 그는 중국에서 영어·영문학 관련 저술과 영문 시집까지 발간한 학자풍의 인물이었다.

    외교를 전담한 조소앙(1887~1958)은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 가담했다. 이어 2년여 유럽 지역에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특히 스위스 루체른에서 개최된 만국사회당대회에 참석하여 한국 독립 승인안을 통과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가 제창한 정치·경제·교육 균등의 삼균주의(三均主義)는 한국독립당의 정치이념이 됐으며, 1941년 11월 대한민국 건국강령에 포함되어 독립 후 민족국가 건설론으로 자리잡았다.

    김원봉(1898~1958)은 광복군 부사령을 거쳐 국무위원 겸 군무부장에 취임했다. 1919년 의열단을 조직한 그는 반일(反日) 테러 투쟁을 지속하다가 황포군관학교를 마쳤고, 1932년 남경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운영한 바 있다. 민족혁명당 창당과 조선의용대 결성을 주도한 그는 좌파적 경향이 강했지만,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다.

    이청천(1888~1957)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30년대 중반까지 주로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 서로군정서를 비롯하여 대한독립군단·고려혁명군·정의부·한국독립군 등을 지휘했다. 1934년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의 책임자로 부임하면서 임정에 참여한 그는 1939년 10월 국무위원에 선임됐다가 한국광복군 총사령으로 광복을 맞았다.

    홍진(1877~1946)은 한말에 법관양성소를 마치고 판사·검사·변호사로 일하다가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1926년 국무령에 선임됐다. 유일당 운동에 적극 관여했으며 그가 보관해 온 임시의정원 문서는 임시정부 연구에 중요한 사료로 이용되고 있다.

    박찬익(1884~1949)은 중국과의 교섭에서 큰 역할을 했다. 그는 중국 국민당 인사들과 가까워 한·중 합작 항일운동에 일찍부터 관여했다. 1933년 김구와 장개석의 면담을 주선하여 낙양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설치하는 기회를 만들었던 그는 광복 뒤 한동안 중국에 남아 임시정부의 주화대표단(駐華代表團)을 이끌었다.

    엄항섭(1898~?)은 김구의 최측근으로 문장이 뛰어나 선전 부문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32년 상해에서 한인애국단의 투쟁을 알리기 위하여 발행된 중국어본 ‘도왜실기(屠倭實記)’는 김구가 약술한 것을 엄항섭이 정리한 것이다. 환국 뒤에도 김구가 발표한 성명서의 대부분은 그가 기초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밖에 장건상이나 유림은 국내에서 옥고를 치르고 탈출하여 중국에서 활동하다가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장건상은 임시정부 대표로 조선독립동맹과의 연계를 위하여 연안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광복을 맞았다. 유림은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리고 김성숙은 김산이 지은 ‘아리랑’에 나오는 승려 출신의 독립운동가 ‘김충창’, 바로 그 사람이었다.

    이처럼 중경 시절 임정에는 다양한 배경과 경력, 이념적 지향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다가옴에 따라 힘을 모아 광복의 그날까지 투쟁했다.

    최기영·서강대 교수

    기고자 : 최기영
    장르 : 연재
    본문자수 : 2442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