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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대한민국림시정부]

망명정부 수립서 환국까지(1919∼1945)
제3부 (5·끝) 광복과 감격어린 환국
‘광복군 국내 진입’ 작전개시 찰나에 日 항복
    한시준

    발행일 : 2005.05.04 / 문화 A25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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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년 8월 10일, 일제(日帝)가 항복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일제의 항복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미국도 예상하지 못했다. 미국의 작전 계획은 1946년 봄 일본 본토를 공격하는 것으로 잡혀 있었고, 그해 말이 되어야 항복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지기 직전, 임정은 여러 방법으로 국내 진입 작전을 추진하고 있었다. 제주도를 거점으로 진입하려는 구상도 그중 하나였다. 김구가 미국의 중국전구(戰區) 사령관인 웨드마이어 장군에게 “미군이 제주도를 점령해 주면 임시정부가 그곳에 들어가 한국인을 영도하여 미군의 작전을 돕겠다”는 제안을 한 것이 그것이었다. 중국과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 압록강으로 진입한다는 구상도 있었다. 이를 위해 국무위원 장건상(張建相)을 연안에 보내 조선독립동맹과의 연계를 추진하였고, 연해주에는 이충모(李忠模)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첩보기구인 OSS와의 합작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방법은 광복군 대원들에게 OSS 훈련을 실시하고, 이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것이었다.

    1945년 8월 4일, 3개월에 걸친 광복군의 OSS 훈련이 완료됐다. 김구는 곧바로 총사령 이청천(李靑天)을 대동하고 서안으로 향했다. 제2지대 본부에서 OSS측과 회의, 광복군 대원들을 국내에 진입시킨다는 작전에 합의했다. OSS 총책임자인 도너번소장은 이 자리에서 임정과 미국이 공동으로 국내진입작전을 전개한다고 선언했다.

    OSS와 협의를 마친 김구는 서안 시내로 나왔다. 저녁식사 자리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그는 다시 제2지대 본부로 돌아갔다. 그리고 OSS측과 합의했던 국내진입작전을 실행하기로 하고, 이범석(李範奭)을 대장으로 한 국내정진대를 편성하였다. 8월 18일 이들은 미군 비행기로 여의도 비행장에 착륙했고, 김구는 중경으로 돌아왔다.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듣고 임정은 ‘국내에 들어가 임정을 국민들에게 봉환’하기로 결정했다. 임정은 3·1운동을 계기로 국민들이 수립한 것이고, 27년 동안 자신들이 대행해 왔던 정권을 국민들에게 갖다 바친다는 논리였다. 김구 주석이 중경에 돌아온 후 활동 방향을 정립, ‘국내외 동포에게 고(告)함’이란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를 통해 해방은 “허다한 선열(先烈)들의 보귀(寶貴)한 열혈(熱血)의 대가와 중·미·소·영 등 동맹군의 영용(英勇)한 전공(戰功)에 의한 것”임을 천명하고, 임정이 추진할 당면 정책을 밝혔다. 국내에 들어가 각계 대표들과 과도정권을 수립하고, 과도정권에서 정식정부를 수립한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임정의 환국은 쉽지 않았다. 중경에서 국내로 이동하는 교통편도 문제였지만, 임정을 승인하지 않았던 미국이 ‘임시정부’ 명의로 입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의 항복 후 한반도는 중국전구에서 태평양전구로 바뀌었고, 38선 이남은 미군이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고 있었다. 입국하려면 미군정의 승낙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임정은 이처럼 환국 과정에서부터 미군정이란 벽에 부딪히게 되었다. 미군정은 입국에 ‘개인자격’이라는 조건을 붙였다. 미군정은 확약을 받고서야 상해로 비행기를 보냈다. 임정 요인은 29명이었지만, 보내온 비행기는 15인승이었다. 고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들어가는 순서를 정해야 했다. 제1진과 제2진으로 나누어졌고, 11월 23일과 12월 1일 각각 환국하였다.

    그러나 임정 요인들은 ‘개인자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들어왔으니 정부도 들어온 것”이란 김구의 언급이나,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개인 자격이지만 국내동포의 입장에서는 정부”라는 성명이 그것이었다.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임정이 귀국한 것으로 환영, 12월 19일 임시정부 개선 환영대회를 개최했다.

    환국 후 임정은 정부로 활동했다. 12월 3일 임정 요인들은 김구의 숙소인 죽첨정에 모였고, 신문은 이를 ‘환국 후 최초의 국무회의’로 보도했다. 모스크바에서 신탁통치 소식이 전해지자, 각계 대표들을 소집하여 반탁(反託)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12월 31일 “전국 행정청 소속의 경찰기구 및 한인 직원은 임정 지휘하에 예속한다”는 내용의 포고를 발표했다. 미군정이 이를 ‘임정의 쿠데타’로 규정했듯이, 임정이 정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정은 미군정이란 벽을 넘기 어려웠다. 미군정은 임정의 활동을 용납하지 않았고, 임정을 와해하는 공작을 추진했다. 임정이 대응책으로 강구한 것은 변신이었다. 1946년 2월 1일 비상국민회의, 2월 14일 최고정무위원회를 조직한 것이 그 시도였다. 비상국민회의는 임시의정원을, 최고정무위원회는 국무회의를 계승한 것이었다. 임정 요인들은 이를 국회와 정부로 여기고, 과도정권 수립을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광복 후 3년 만에 독립국가를 건설하였다. 1948년 8월 대한민국을 건국한 것이다. ‘대한민국’이란 국호는 임시정부가 사용한 국호였고, 제헌 헌법은 임정의 헌법을 참조했다. 민주공화제 정부로 수립된 것도, 임정이 그것을 채택하여 운영해 온 경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1987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대한민국은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였다”고 하여,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뿌리가 임정에 있다는 것을 명문화했다.

    임정이 남긴 주요한 자산이 있다. ‘완전 독립’ ‘자주 독립’이 그것이다. 이것은 임정의 정신이었다. 임정이 27년 동안 존립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정신 때문이었다. 이에 어긋나면 임정은 참지 않았다. 미·영 사이에 국제공동관리가 논의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임정은 즉각 반대하는 한편, 1943년 5월 재중(在中) 자유한인대회를 개최하여 대규모 반대운동을 일으켰다. 카이로회의에서 한국독립을 보장하며 ‘적당한 시기’라는 조건을 붙였을 때도 그랬다. 조건부 독립을 반대하며, “일제 패망과 더불어 즉시 독립되지 않으면 상대가 누구든지 독립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한 것이다. 모스크바 결정이 알려지자 즉각 반탁 운동에 나선 것은 국제공동관리 반대운동의 연장이었고, 미군정과 대결한 것도 그 정신 때문이었다.

    한시준·단국대 교수

    기고자 : 한시준
    장르 :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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