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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이 김대중(DJ) 정권 출범 직후 퇴직한 국가정보원 직원에 의해 유출된 ‘안기부 도청 테이프’를 미끼로 ‘수억원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받았던 것으로 21일 밝혀졌다. 국정원 관계자들에 따르면 DJ정권에서 두 번째 국정원장인 천용택(千容宅) 원장 취임 후인 1999년 중반 무렵, 안기부 도청테이프를 들고 나간 국정원 퇴직 직원이 당시 삼성그룹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에게 ‘97년 대선 당시 삼성의 대선자금 지원 논의 내용이 담긴 테이프가 있다’는 취지로 3억원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YS정권 시절 안기부의 극비보안 사항이던 ‘미림팀’의 실체가 DJ정권으로 바뀐 뒤 명칭을 바꾼 국정원에 알려진 계기가 됐다.

◆도청테이프 유출 어떻게

국정원 관계자 X씨는 “당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이 엄익준(작고) 전 국정원 2차장에게 ‘누군가 테이프를 미끼로 돈을 요구해 온다’고 협조 요청을 해와 국정원이 발칵 뒤집힌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퇴직 직원은 당시 삼성측에 도청 테이프의 ‘녹취록’을 보낸 뒤, 여자 1명과 함께 이 구조조정본부장을 만났으나 삼성에서 돈은 받지 못했다고 국정원 관계자는 전했다.

이후 국정원은 삼성측에 “요구에 굴복하지 말라”고 한 뒤 감찰실을 동원, 테이프 전량을 압수했다. 국정원은 또 감찰실과는 다른 조직에서 퇴직 직원이 도청테이프를 유출한 경위 파악에 들어갔다. 미림팀 요원 중 한 명이 1998년 퇴직하면서 5년치 도청테이프를 밖으로 갖고 나갔지만 미림이 드러나지 않은 비밀조직인 데다 정권 교체기여서 1년 이상 아무도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도청테이프 회수 작업에 관련된 인사는 “돈 요구에 응하면 말로만 떠돌던 정보기관의 도청을 입증하는 증거자료가 될 수 있는 데다, 도청 내용을 시인하는 셈이 됐기 때문에 오히려 강하게 나갔다”고 말했다. 협박 당사자로 지목된 퇴직 직원은 그러나 “도청테이프는 갖고 나왔다가 반납했지만, 삼성을 협박하고 그런 일은 절대 없었다”고 말했다.

도청테이프 회수 당시 국정원 감찰실장이던 L씨는 “(퇴직 직원이 테이프를 갖고) 삼성 돈을 우려먹으려고 한 거지…”라고 당시의 정황은 시인하면서도 나머지 테이프 처리에 대해선 “국정원 퇴직과 동시에 모든 걸 잊고 나왔으니 묻지 말라”고 했다. L씨는 “(삼성 관련 도청) 녹취록은 예전부터 돌아다니던 것으로 이 사람 저 사람 손을 다 거쳤는데, 이제서야 난리냐”라고 말해 녹취록 복사본이 한때 상당히 퍼져 있었음을 시사했다.

당시 테이프 내용을 접했던 국정원 관련 인사는 “국정원이 회수한 테이프 내용과 MBC쪽이 입수한 테이프 내용이 일치하는 부분이 있지만 당시 듣지 못했던 내용도 들어 있어 MBC측 테이프는 여러 개의 도청테이프가 짜깁기 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도청테이프 어떻게 처리됐나.

국정원이 회수한 도청테이프는 군용 더플백 2개에 가득 찼을 만큼 많았다. 당시 국정원 감찰실은 회수한 테이프를 밀봉 상태로 천용택 원장에게 넘겨줬고, 이후 불태웠다고 말한다. 국정원에 정통한 인사는 그러나 “그냥 불태우면 정보기관이 아니다”면서 “테이프를 전부 다시 풀어 중요한 테이프 내용은 보고된 것으로 간주하면 된다”고 말했다. 천 원장은 도청테이프 회수 건에 대해 “잘 모르는 내용이며, 금시초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중요한 테이프가 여전히 몇몇 전·현직 국정원 관계자들 손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진동기자 (블로그)jaydlee.chosun.com

<그래픽> 도청테이프 유출 과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