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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ㆍ25 60주년] [나와 6·25] (42) 채명신 前 주월사령관 (下)

최초 유격부대 백골병단 이끌고 침투… 北 유격부대 지휘관·참모진 몰살
    채명신 특별취재팀 장일현 허윤희 손진석 김충령 박진영 심현정

    발행일 : 2010.05.26 / 종합 A6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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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덕지구 빨치산을 토벌한 뒤, 안동에 돌아와 있는 동안 전쟁을 맞았다. 북한의 기습공격을 받은 우리 군은 우왕좌왕이었다. 대대에서 온 첫 무전연락은 "당장 서울 영등포역으로 이동하라"였다. 2시간 후쯤엔 "동해안으로 가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삼척에 상륙한 적 1개 연대를 저지하라는 것이었다. 우리 1개 중대 병력으로 적 정규군 3000여명과 정면 대결할 순 없었다. 적 1개 첨병 소대를 타격한 뒤, 후퇴를 거듭했다.

    닭 한 마리 때문에 연대장 잃고…권총자살 시도는 실패

    전황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했다. 유엔군 반격을 계기로 내 중대는 자강도 희천까지 진격했으나 곧 중공군에 밀렸다. 그때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다. 그해 12월쯤 낭림산맥 산악지역에서 우린 적에게 쫓기고 있었다. 우리 연대가 패퇴하는 과정에서 연대장이 적지에 고립됐고 내가 특공대를 이끌고 들어갔다. 그는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연대장은 "딱 닭 한 마리만 먹고 가면 원이 없겠다"고 했다. 우린 위험을 무릅쓰고 인근 마을로 들어갔다. 그것은 패착이었다. 우린 적들의 포위 공격에 걸려들었다. 필사적으로 탈출했지만 연대장의 모습은 보이질 않았다.

    며칠 후엔 나도 죽음의 문턱에 섰다. 부하 2명과 한 민가에 들어갔다가 북한군에 포위됐다. 빠져나갈 길은 없었다. 권총을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불발이었다. 다시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정용식 상사가 내 손목을 낚아챘다. "죽지 말라는데 왜 죽습니까." 3인칭 어법. 누가 날 죽지 말라고 한다고…. 묘한 감정이 일었다. 그 순간 방으로 들이닥치는 북한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적들은 많았지만 다행히 전투병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백골병단'의 눈부신 활약

    1951년 초 우리 군 최초의 특수 유격부대인 '백골병단(白骨兵團)'을 이끌게 됐다. 부대원들은 전원 민간인 출신. 훈련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출격했지만 놀라운 전과를 올렸다. 식량은 2주일치 미숫가루와 고추장, 소금이 전부였다. 우린 북한군 복장으로 위장했다.

    2월 하순 오대산 일대에서 적 연락군관단 5명을 잡아 북한군 69여단과 2군단사령부 내부 상황과 소재를 알아냈다. 유엔군의 대대적인 폭격이 이어졌다. 이어, 적진 깊숙이 들어가면서 적 초소 4개를 박살 냈고, 연락병과 빨치산도 사살했다. 최대의 성과는 길원팔이었다. 그는 조선공산당 제2비서 겸 북한군 현역 중장이며 대남 유격부대의 총사령관이었다. 3월 중순, 그를 비롯해 그의 빨치산 부대 참모진을 몰살시켰다.

    길원팔은 적이었지만 인상적인 군인이었다. "남으로 가자"는 내 제안에 자살을 택했다. 총알 한 발을 넣은 권총을 건넸고, 그는 스스로 방아쇠를 당겼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부하 전우를 잃었다. 적 추격과 포위 공격에 목숨을 잃었고, 배고픔과 추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었다. 단목령(일명 박달재)에서만 120여명을 잃었다. 가장 마음 아픈 건 그들에게 정식 군인 계급을 달아주지 못한 것이다. 군 수뇌부는 "살아 돌아오면 정식 계급을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규정이 달라졌다고 했다. 이들의 한을 풀어줄 날이 언제나 올는지….

    군에서 만난 인연들, 떠나간 사람들

    박정희 대령을 만난 건 1951년 4월초. 당시 강릉 9사단 참모장이던 그가 백골병단 활동에서 막 돌아온 나를 불고기집으로 초대했다. 육사 생도시절 옆 중대장이던 그를 먼발치로 보긴 했지만 직접 만난 건 처음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키가 작고 당찬 그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임무를 100% 완수했다"고 칭찬해주었다. 흰 이를 드러내고 웃으며 내 얘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었다. 그는 피로 얼룩지고 너덜너덜해진 내 점퍼에 관심을 보였다. 내가 북한을 탈출할 때 입었던 것으로 딱 한 번 빨아 입고, 유격활동 때도 벗지 않았던 옷이다. 그는 "이봐 역사적인 점퍼잖아. 내 것하고 바꿔 입자고"하며 자신의 점퍼를 벗어 내게 건넸다. 자신의 고급 점퍼를 내게 주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박 대령과의 인연은 5·16 군사혁명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5연대장 시절엔 하나밖에 없던 동생을 전장에서 잃었다. 동생은 1·4 후퇴 때 남으로 넘어와 곧바로 장교로 입대했다고 한다. 동생은 바로 옆 36연대에서 근무했는데, 그가 화랑무공훈장을 받아 휴가를 나왔을 때 딱 한 번 만났다. 하지만 나를 만난 뒤 얼마 안 돼 적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동생을 잃었을 때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하지만 아끼는 부하를 잃었을 때는 펑펑 울었다. 3대대장인 노심근 소령이 전초기지를 둘러보다 적 60㎜ 박격포를 맞고 사망한 날, 난 창피함도 모르고 엉엉 울었고 밥도 먹지 않았다. 그는 일곱번이나 부상을 당하고 사경을 헤매다가도 곧바로 전선으로 돌아오곤 했던 진정 용감하고 철저한 군인이었다.

    전쟁을 통해 배운 수많은 교훈들

    5연대는 1년 새 연대장이 6명이나 바뀌었다. 작전 실패와 전사, 부상 등 때문이었다. 1951년 8월 부연대장이던 내가 공석이던 5연대장에 임명됐다. 소위 임관 후 3년 4개월 만에 연대장(대령)이 된 것이다. 당시는 군이 급팽창하던 시기였고 수많은 장교들이 전사해 진급이 빨랐다.

    패전만 하던 5연대가 마침내 800고지를 점령하고, 적으로부터 지켰다. 그 고지 이름은 '절개고지'가 됐다. 이 작전에서 나는 전과는 다른 전법을 썼다. 소수의 특공대로 빠르게 고지를 점령한 뒤, 참호를 깊게 파서 적의 포화를 견디도록 한 것이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부하들을 훈련시켰다. 잠을 깨워가며 야간 사격도 시켰다. "땀은 피를 대신한다"고 수없이 강조했다. 훈련하지 않는 군인은 군인이 아니다.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다. 이러한 원칙을 나는 이후 모든 전장에서 지키려고 했다.

    60연대장 시절엔 중공군에 풍비박산 난 부대를 재정비해 M1 고지를 점령했다. 2개 대대병력으로도 탈취하지 못했던 고지를 불과 1개 중대로 두 시간 만에 점령했다. 당시 고지 주변은 아군과 적의 시체밭이었다. 그 전투에서 난 중공군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얻었다. 적들은 우리의 총포탄이 엄청나게 떨어지는 가운데서도 죽은 전우의 시체를 한 명도 빠짐없이 회수해 가려고 했다. 미군 교리는 죽은 전우 때문에 산 사람이 또 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양인의 합리적 사고로는 해석되지 않는 중공군의 전우애…. 이 교훈 또한 훗날 베트남전 때 그대로 활용했다.

    이렇게 전쟁을 거치면서, 또 엄청난 희생을 치르면서 나와 우리 군은 단련되고 또 성숙해졌다.

    채명신 前 주월사령관
    기고자 : 채명신 특별취재팀 장일현 허윤희 손진석 김충령 박진영 심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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