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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中)

인민군복의 유격대 이끌고 적진 침투… 공산당 간부 길원팔(대남유격사령관) 생포
    문갑식

    발행일 : 2011.07.26 / 특집 A20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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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와 공산주의의 전쟁은 6·25가 일어나기 2년 전인 1948년 시작됐다. 1951년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게 개성 송악산의 '육탄 10용사' 전투, 중공군 사령관 팽덕회와 조우, 닭 한 마리 때문에 부대원 전원이 몰살당할 뻔한 일이었다.

    1949년 나는 11연대 4중대장으로 송악산 주봉을 경계로 인민군 1사단과 대치했다. 5월 3일 인민군이 기습을 해왔다. 아군은 다음 날 새벽 즉각 반격했다. 나는 송악산 좌측, 김영직 대위의 하사관교육대는 우측 비둘기고지가 목표였다.

    비둘기고지에선 격전이 벌어졌다. 적이 쏴댄 기관포에 소대장과 분대장이 전사했다. 지휘관을 잃은 병사들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은 육탄 공격을 결심했다.

    분개한 1소대 1분대장 서부덕 상사, 박창근 하사, 윤옥춘·황금재·오제용·박평서·이희복·김종해·윤승원·양용순 상병이 자진해서 나섰다. 이들은 81㎜ 박격포탄을 안고 적 토치카로 돌입했다. 자폭 작전이었다. 이들이 그 유명한 '육탄(肉彈) 10용사'다.

    이 전투에서 나는 네 살 위로 형처럼 생각했던 김영직 대위를 잃었다. 호국(護國)의 표본, 군인정신의 정화(精華)인 그들은 경기도 파주 육탄 10용사 충용탑에 동상이 돼 서 있다. 송악산전투 후 나는 경북 안동 25연대로 전속됐다.

    1950년 6·25가 터지고 영천 방어전에 임하던 내게 9월 16일 북진 명령이 내렸다. 죽령터널~충북단양~황해도곡산~평남덕천까지 파죽지세로 올라가면서 점점 '너무 빨리 가는 것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처럼 적들도 무슨 작전을 쓸 것 같았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팽덕회(彭德懷)가 이끄는 중공 4야전군이 밀고 내려온 것이다. 나는 평북 희천에서 처음 중공군과 교전했다. 그들은 주로 밤에 공격했다. 기분 나쁜 피리 소리에 이어 파란 신호탄이 올라가면 벼락처럼 함성을 질렀다. 마치 해일 같았다.

    돌이켜보면 아군은 청천강 목 좁은 전선에서 강한 방어선을 쳐야 했다. 그런데 '누가 먼저 압록강 물을 떠먹을까'라는 경주만 벌였다. 전략 요충을 그냥 지나친 것이다. 우리와 동해안 전선은 텅 비었다. 중공군은 그 틈을 타고 남진했다.

    11월의 낭림산맥은 추웠다. 정신없이 후퇴하다 보니 연대 지휘부와 떨어지게 됐다. 통신마저 끊겨 결국 적진에서 우리 대대(북진 중 승진)만 독자 행동을 해야 했다. 며칠 뒤 겨우 통신이 연결됐다. 3대대장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대장이 중공군에게 포위됐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리 달려도 5시간 거리에 있었다. 대대 병력을 끌고 갈 수 없어 특공대 50명을 이끌고 갔다.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연대장을 구출했다. 생존자가 80명에 불과했다. 참패였다.
    기고자 : 문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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