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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협정 58주년 주간 연재] [영원한 사령관 채명신의 '내가 겪은 전쟁'] (下·끝)

월맹군, 1개 연대가 청룡(파월 해병대) 1개 중대에 궤멸되자 "한국군 피하라" 지령
    문갑식

    발행일 : 2011.08.02 / 특집 A21 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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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치의 땅이라도 더 가지려는 혈전(血戰)이 전쟁 말 곳곳에서 벌어졌다. 텍사스고지, M1고지 전투가 그 대표적인 현장으로 상대는 중공군이었다. 1953년 7월 27일, 3년 2개월에 걸친 포성(砲聲)이 멈췄다. 당시 나는 60연대장이었다.

    1948년 제주 4·3사건부터 시작된 나와 공산주의의 싸움이 5년을 넘겼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1965년 3월 김용배 육군참모총장이 나를 호출했다. 육군작전참모부장으로 발령 내면서 1964년 터진 베트남전 연구를 지시했다.

    좌익·종북주의자들은 지금 한국의 베트남전 참전을 '미제의 용병'이라 폄하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이 참전하지 않으면 주한 미2·7사단을 빼려 했다. 당시 미군 1개 사단 전력은 국군 수개 사단에 맞먹을 만큼 강했다.

    북한은 1962년 4대 군사노선으로 군비를 증강했다. 우리 전력은 6·25전쟁 때만큼이나 열세였다. 김일성은 "전쟁이 터지면 잃는 것은 휴전선, 얻는 것은 조국통일"이라고 종종 큰소리쳤다. 그런 때 미군 2개 사단의 이탈은 국가 위기였다.

    결국 우리는 1964년 9월 외과병원 장병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을 파병했다. 1965년 1월 8일 2000명의 군사원조단을 보냈고 비둘기부대·육군 맹호부대·해병 청룡부대를 파견하게 됐다. 8년간 연인원 31만2853명이 참전하게 됐다.

    1972년 3월 사령부가 철수할 때까지 한국군은 월남에서 신화적인 무공을 세운다. 그중 내가 제일 자랑하고 싶은 것은 '두코 전투'와 해병 신화(神話)를 세운 '짜빈동 전투'다. 맹호6호, 오작교, 암행어사작전도 그에 못지않다.

    1966년 7월 맹호기갑연대 3대대는 미군의 '파울리비아'작전을 지원하러 캄보디아쪽 국경 4㎞ 지점의 두코(Duc co)로 이동했다. 이때 우리는 대규모 인원과 화력을 동원하는 미군과 달리 중대(中隊) 위주 전술기지 방어 개념을 도입했다.

    8월 9일 밤 10시 40분부터 다음날 새벽 4시 30분까지 월맹군 2개 대대가 인해전술로 아군 1개 중대를 기습했다. 적의 맹렬한 기관총과 박격포 공격을 교통호 속에서 견디던 맹호용사들은 미군 전차 2대가 지원해주는 틈을 타 반격에 나섰다. 백병전 결과는 대승이었다. 아군은 7명이 전사했지만 월맹군 189명을 사살하고 6명을 포로로 잡았고 기관총·로켓포·실탄 수만 발을 노획했다. 미군사령관은 현장을 찾아 "보지 않고는 사실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압승"이라고 했다.

    당시 공격부대는 월맹군 88연대 2개 대대 700명 병력으로 아군보다 6배나 많았다. 공산주의자들은 후퇴 때 꼭 시체를 챙겨 가는데 그럼에도 200명가량을 남긴 걸 보면 500명 가까이를 잃은 게 분명했다. 한마디로 궤멸적 패배를 당한 것이다.

    다음 날 현장을 찾은 외신기자 중 1년 후 이스라엘의 국방장관이 된 모세 다얀이 있었다. 그는 당시 통신사 기자였는데 두코전투의 포병전에 주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1967년 6일전쟁 때 전격전(電擊戰)의 신화를 이끈다.

    큰 전과를 올렸지만 월맹군의 보복이 걱정됐다. 다섯달 후 마침내 우려가 사실로 드러났다. 파월한국군 가운데 가장 북쪽에 위치한 청룡부대 11중대가 타깃이 된 것이다. 청룡부대 주둔지 주변의 부락민들은 거의 적색(赤色)분자였다. 월맹군은 한국군의 손발을 묶으려는 듯 아이와 어린아이들을 맨 앞에 내세우며 공격해 왔다. 1967년 2월 14일, 짧았던 구정(舊正) 휴전이 끝나는 칠흑처럼 어두운 밤이었다. 당시 11중대 1소대장이 지금 재향군인회 신원배 사무총장이다.

    월맹군은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했다. 적 수백 명이 달려들었지만 2분대장 이중재 하사가 화염방사기 사수(射手)의 뒤통수를 개머리판으로 쳐 무력화시킨 뒤 이진 병장, 김용길 중사가 수류탄으로 적 대전차유탄포·로켓 진지를 무너뜨렸다.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백병전은 다음 날 새벽까지 계속됐다. 결과는 적 사살 243명, 포로 2명. 적 1개 연대 공격을 우리 해병 1개 중대가 막아내자 미국 언론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고의 승전보라 평가했다.

    닉슨 대통령도 나섰다. "17년 전(6·25전쟁 때) 미국이 한국에 심었던 신뢰와 도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준 쾌거입니다!" 이 전투 후 뉴욕타임스가 월맹의 지령문을 보도했다. '100% 승리의 확신이 없는 한 한국군과의 교전을 무조건 피하라.'

    월맹군은 한술 더 떠 한국군을 이렇게 평가했다. '한국군은 모두 태권도로 단련된 군대니 비무장 한국군에게도 함부로 덤비지 말라.' 전투에 참가한 병사 전원이 1계급 특진했다. 대한민국 훈·포상법 제정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한국은 월남에서 유례가 없는 전과를 올렸다. 난 이게 절대적인 전력 열세 속에서도 조국을 지켜낸 6·25전쟁의 경험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6·25전쟁과 베트남전을 거치면서 한국군은 세계가 무시할 수 없는 최강의 군대로 재탄생했다.
    기고자 : 문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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