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망한민국·헬(hell·지옥)조선… 우리 청년들은 왜, 대한민국을 지옥으로 부르게 됐나

취업난에 지친 그들, 기성세대에 대한 불만 넘어 적대감 표출
    곽아람

    발행일 : 2015.08.22 / 통판 B4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스펙이 낮으면 스펙을 높이라고 하고, 스펙이 높으면 눈높이를 낮추라는 국가' '젊은이들의 아픔을 청춘으로 치부하는 국가' '사회가 잘못돼 취업을 못해도 개인 노력이 부족해 취업이 안 되는 거라 말하는 국가'….

    인터넷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의 이용자 참여 백과사전 디시위키에서 '헬조선' 항목을 검색하면 이런 정의들이 뜬다. 이 냉소적인 국가관을 담은 단어 '헬조선'이 20~30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헬조선'이란 '헬(hell·지옥)'과 '조선(朝鮮)'의 합성어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을 가리키는 자조적 표현이다. '망한민국' '불지옥반도' '개한민국' 같은 단어들도 같은 맥락에서 사용된다.

    요즘 우리 사회 일부 젊은이들은 단순한 반항이나 불만의 수준을 넘어 사회나 국가, 기성세대를 향해 적대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젊은 시절 한때의 치기로 보기에는 그 뿌리가 깊고 정도가 심하다는 우려도 나온다.

    젊은이들, 대한민국을 '지옥'이라 부르다

    애초에 '헬조선'이라는 말은 혐한(嫌韓)·친일 성향이 강한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유행하다가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서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가고 있다.

    지난 5월 대한민국이 지옥 같은 곳임을 보여주는 이슈들을 모으는 인터넷 사이트인 '헬조선'(www.hellkorea.com)이 개설됐다. 광고회사에서 일한다는 김모(30)씨가 사비를 털어 운영하는 이 사이트엔 현재 회원 1000여명이 가입해 활동 중이다. 페이스북에 개설된 '헬조선' 페이지에는 3500여명이 '좋아요'를 눌러 뉴스를 구독한다. 지난 10일에는 대한민국의 비이성적인 뉴스를 공유하는 '헬조선뉴스'라는 인터넷 사이트도 만들어졌다.

    '헬조선'을 주제로 하는 각종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들은 재벌가(家)의 상속 다툼부터 사회 곳곳의 '갑질' 현상까지 한국사회의 불편한 민낯을 보여주는 불편한 뉴스들로 가득하다. 사이트 운영자나 댓글을 다는 네티즌들이 단골로 사용하는 단어는 '헬조선 클래스(class)'이다. 해석하면 '헬조선 수준이 그렇지 뭐'라는 뜻이다. '헬조선' 사이트 공지에는 "기득권층은 (겉으로는) '대한민국이 이렇게 살기 좋은 나라다'라고 선전하면서 (뒤에선) 원정출산, 이중국적, 국적 포기를 선도하고 있는데 남은 자들은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라는 애국 이데올로기에 묶여 있는 것이 '헬조선'의 현실"이라고 적혀 있다.

    "노력해 봤다. 그런데 성공 못 하더라"

    헬조선 정서의 확산은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각종 사회 문제와 궤를 같이한다. 별 따기 만큼이나 구하기 어려운 일자리 문제가 대표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에 따르면 한국 올해 1분기 청년실업률은 10.9%, 체감 실업률은 11.3%에 달했다. 젊은이 10명 중 1명은 실업자란 얘기다.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만 해도 청년 실업률은 2013년 1분기와 2분기에 각각 6.9%와 7%를 기록하다 이후 계속 감소하는 추세다.

    필사적으로 애써도 번듯한 직장을 구할 수 없는 젊은이들은 인생의 목표를 향한 달리기에서 점점 지쳐가는 모습을 보인다. 이 때문에 '헬조선 세대'들은 '노력'이라는 단어를 혐오한다. "노력을 해야 취업이 되지" "노력을 해야 성공한다" 같은 기성세대들의 충고는 '헬조선 세대'들에 의해 '노오오오력'이라는 우스꽝스러운 단어로 바뀌어 희화화된다. 노력만 강조하는 사람들을 비꼬아 말하는 '노력충(蟲)'이라는 단어도 유행하고 있다. 헬조선 운영자 김모씨에 따르면 이는 "'네가 대학을 못 간 이유는 노력이 부족해서' '네가 취직 못 한 이유는 노력이 부족해서' 등 구조적, 사회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개인의 노력부족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데 대한 반발"이다.

    어렵게 취업문을 뚫은 사람들도 헬조선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박시형(가명·30)씨는 서울 명문대 로스쿨을 졸업하고 지난해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대형 로펌 입사가 예정돼 있지만 박씨는 "대한민국은 '헬조선'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력해서 자격증을 땄지만 부모님 세대와 달리 안정된 미래가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무한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적(敵)인 데다 혐오가 넘쳐나고 공동체 의식이 파괴된 이 나라에는 답이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직장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삶의 질' 문제도 젊은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요소들이다. 2013년 기준 우리나라 근로자들은 1년에 평균 2163시간을 일했다. 34개 OECD 회원국 중 멕시코(2237시간)에 이어 2위다. OECD 평균(1725시간)보다 438시간 많다. 요즘처럼 SNS를 통해 실시간으로 전 세계인의 삶을 알 수 있는 시대에선 남들과 다른 차이가 더욱 두드러지게 보일 수밖에 없다.

    굶주림과 가난을 직접 몸으로 겪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형편이 나아졌던 부모 세대와 그런 부모의 보호막 속에서 안락한 생활을 누린 젊은 세대가 정서적·문화적으로 충돌하는 양상도 나타나고 있다

    ‘헬조선론(論)'에 동의한다는 송정아(31·대학원생)씨는 "부모님과 나는 각각 다른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부모님 세대는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과 상관없이 사회가 그들을 끌고 갈 수 있을 만큼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냈지만 지금은 개인이 무능하면 나락으로 떨어지고 사회가 그를 구원해주지도 못한다. 그런데 부모님들은 그 불안감에 대한 이해가 조금도 없이 '네가 노력을 안 해 문제'라고 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모 세대들은 "진짜 고통, 어려움을 제대로 겪어보지 않은 나약한 세대들의 투정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386세대인 대기업 중견간부 A씨는 "젊은이들의 '헬조선론'을 들으면 세상을 근시안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을 들여 뭔가를 얻으려 하지 않고 지름길만 가려다가 포기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노명우 아주대 사회학과 교수는 '헬조선론'이 일종의 '중산층 정서'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잉여론'에서 '체념'을 이야기했다면, '헬조선론'에는 체념을 넘어선 분노가 담겨 있다"면서 "사회 하층은 성취에 대한 기대치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좌절의 낙차가 크지 않고, 상류층은 기대가 좌절될 가능성이 적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자기계발 담론의 세례를 받고 자란 중산층 젊은이들은 성취에 대한 기대는 높지만 노력이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니 깊은 분노에 빠지게 된다"고 말했다.

    일부 기득권층의 꼴불견이 상황 악화시켜

    최근엔 윤후덕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딸 취업 청탁 의혹이 '헬조선 세대'의 절망감에 불을 지폈다. "헬조선에서는 부모를 잘 만나야만 성공한다"는 이른바 '수저론(論)'은 헬조선 담론의 근간을 이룬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부유한 집에서 태어났다)'는 영어 표현에서 유래한 말로 부모의 재력과 권력에 따라 금수저-은수저-동수저-흙수저-똥수저 등으로 분류된다.

    회사원 조민준(33)씨 부부는 서울대 출신의 맞벌이다. 부부 합산 연소득은 세후 1억3000만원 정도. 남들은 '많이 번다'고 하지만 조씨 부부는 자녀 계획을 망설이고 있다. 조씨는 "돈 많고 권세 있는 집안에 태어났다면 청탁이라도 해서 자식을 잘되게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없는 집에서 태어나 부모님 부양부터 해야 한다. 자식 낳아봤자 나랑 비슷하게밖에 못 살 것 같은데 아이에게 이런 세상을 살라고 하고싶지 않다"고 말했다.

    금수저·은수저 얘기는 오래전부터 있었던 일이고,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일이다. 그런데 유독 우리 사회 젊은이들이 깊게 빠져드는 것은 최근 들어 '계층 이동'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현실 때문이다. 좋은 직장, 부(富), 명예 등을 손에 넣을 기회의 문이 자꾸 줄어들고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전상진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는 "중요한 것은 지금 한국 사회가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있느냐의 문제"라고 했다. 전 교수는 "예전에도 부(富)와 권력의 세습은 있었지만 사회가 나아지고 있고, 내가 노력하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면서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계층 간 이동의 불가능성이 지금처럼 명확했던 시기는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단적으로 서울지역 일반고 출신의 서울대 정시 합격자 중 70%가 이른바 '강남 3구' 출신이라는 통계가 이를 증명한다"며 "매년 일어나는 사건·사고로 정부에 대한 불신도 깊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청년들이 '헬조선'을 외치지 않는다면 이상할 정도"라고 말했다.

    한국이 싫어서… 탈출 꿈꾸는 청년들

    대한민국에 실망한 '헬조선 세대'들은 '탈(脫)조선'을 꿈꾼다. '헬조선' 사이트의 '탈조선' 게시판에는 선진국들의 복지 정책이라든가 이민 정보 등이 속속 올라온다. 이민 전문가 새미 리 SYL글로벌컨설팅 이사는 "어릴 때부터 해외 문물을 경험하고 정보 습득에 빠른 젊은 세대들이 선진국의 복지정책과 국내 상황을 비교하다 보니 한국 탈출을 꿈꾸게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출간돼 20~30대 독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3개월 만에 1만부 팔린 장강명 소설 '한국이 싫어서'는 '헬조선 세대'의 서글픈 자화상을 반영한다. '한국이 싫어서' 호주 이민을 선택한 20대 여성의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에서 독자들이 가장 공감하며 SNS에 올리는 구절은 이렇다.

    "내가 여기서는 못 살겠다고 생각하는 건… 난 정말 한국에서는 경쟁력이 없는 인간이야. 무슨 멸종돼야 할 동물 같아. 추위도 너무 잘 타고, 뭘 치열하게 목숨 걸고 하지도 못하고, 물려받은 것도 개뿔 없고. 그런 주제에 까다롭기는 또 더럽게 까다로워요. 직장은 통근 거리가 중요하다느니, 사는 곳 주변에 문화시설이 많으면 좋겠다느니, 하는 일은 자아를 실현할 수 있는 거면 좋겠다느니, 막 그런 걸 따져."

    기고자 : 곽아람
    본문자수 : 5019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