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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버지는 오랜 시간 탄광에서 일하셨다. 정년 퇴임을 한 뒤에도 몇 년은 더 탄광 일을 했다. 칠순 후반인 아버지의 일상은 새벽 4시에 시작된다. 간단한 세수를 마친 뒤 성경이 든 가방을 들고 오래된 차를 몰고 새벽 교회에 간다. 한 시간 뒤에 집에 와서 아침 식사 시간까지 주무신 뒤 일어나서 달짝지근한 커피와 함께 본격적인 하루를 시작한다.

오전 시간은 내내 성경 필사를 한다. 십년째 계속하는 성경 필사는 아버지의 주된 일과다. 서울 인사동에서 가장 좋은 종이를 사서 일일이 재단을 하고 잘라서 매일 일정 분량을 쓴다. 재단한 종이는 자로 재어 연필로 가는 금을 긋고, 붓펜을 사용해서 한자 한자 옮겨 적어간다. 붓펜이 닳아 끝이 무뎌지면 가위로 잘라 날카롭게 만들어서 쓰고, 더 이상 자를 수 없을 때까지 알뜰하게 펜을 사용한다.

어느 여름 나는 아버지의 성경 필사를 지켜보다가 "손주를 위해 천자문을 써 주세요"라고 부탁을 드렸다. 한자를 아는 것과 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옆에 음(音)을 적기 위한 공간을 별도로 배정하는 등 여러 번의 연습과 실패를 거친 후 드디어 아버지의 천자문을 받아보게 됐다. 색을 달리해서 필순(筆順)까지 넣어주신 아버지의 정성에 감동했다. 몇 통의 먹물을 썼고, 몇 자루의 붓이 뭉툭하게 됐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었지만, 얼마나 오랜 시간을 천자문 쓰기에 매달렸는지 충분히 짐작이 됐다.

나는 4남매의 맏이다. 결혼하지 않은 셋째를 제외하고 우리 남매의 책장에는 모두 아버지가 손자·손녀에게 써 주신 천자문 책이 꽂혀 있다. 나는 가끔 그 책을 꺼내서 살펴본다. 종이를 재단하고 줄을 긋고 한 글자씩 써 내려간 정갈한 글씨와 오침법(五針法)을 사용해서 옛날 책처럼 제본한 천자문에서 아버지의 정성을 느낀다. 아직은 손자 손녀들이 어리지만 언젠가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깨닫게 될 날이 오리란 것도 안다. 멀리 떨어져 지내지만 손자 손녀를 그리워하는 부모님들께 내 아이의 목소리를 자주 들려 드리고 싶다.

김은경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

※ 5월 일사일언 필자는 김은경 상임연구원과 따루 살미넨 작가 겸 방송인, 탁현규 간송미술관 연구원, 김주영 피아니스트, 안현배 미술사연구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