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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전직 국세청장은 자리가 조금 무거워진다 싶으면 이런 농담을 꺼냈다. "남녀노소 누구나 가장 무서워하고, 피하고 싶어 하는 건 죽음이다. 그러면, 두 번째는 뭔 줄 아느냐?" 잠시 뜸을 들인 그가 "뭐긴 뭐겠느냐, 세금 고지서지!"라고 하면 웃음이 터졌다. 국세청장이 세금이 무섭다는 얘기를 하니 제법 웃겼다. 납세의 의무가 국민의 4대 의무 가운데 하나이지만, 세금 고지서 반가운 사람은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법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에게 증세(增稅)는 정치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태로운 주장이다. 세금 더 걷겠다는 정치인을 반길 국민이 없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가 복지를 늘리겠다고 하면서도 '증세 없는 복지'라는 괴상한 말을 만들어낸 이유다. 세상에 네모난 삼각형은 없는데도 그런 표현을 썼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총선에서 용기 있게 증세 공약을 내걸 수 있었던 것도 더 걷겠다는 세금이 법인세라서다. 소득세나 부가가치세는 납세자들이 투표권을 갖고 있지만, 법인세를 내는 기업은 투표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에서 낮춘 법인세를 원상 회복시켜 대기업들이 세금을 '원래대로' 더 내게 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우긴 했지만, 법인세에 투표권이 있었다면 증세 얘기를 꺼낼 엄두도 내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현재 10%인 부가가치세 세율을 13% 정도로 높이면 복지 비용을 충당할 만하다. 그러나 부가가치세는 생수 한 병을 사 먹어도 붙기 때문에 전 국민 누구든 납세자가 되니 세율 인상은 언감생심이다.

고령화와 무상 복지 확대로 돈 쓸 곳은 걷잡을 수 없이 늘고 있지만, 세금 늘리자는 얘기는 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정부나 여야 정치인을 비겁하다고 욕할 일이 아니다. 어느 나라건 마찬가지다. 보다 못했는지 바다 건너 미국에서는 부자들이 직접 나섰다.

미국 시각으로 지난 3월 21일 워싱턴포스트는 뉴욕주(州)의 백만장자 51명이 뉴욕주지사와 주의회에 '상위 1% 부자 증세'를 요구하는 청원서를 보냈다고 보도했다. 이 청원에는 월트 디즈니의 손녀 애비게일 디즈니, 석유왕 존 록펠러의 5세손인 스티븐 록펠러 등이 참여했다. 그들은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둬야 한다. 우리는 공정한 몫을 부담할 능력도 책임도 있다"고 했다. 그들은 "뉴욕주 도심 일부 지역의 아동 빈곤율이 절반이나 되고, 뉴욕주 전역에 8만명 이상의 노숙자가 있을 정도로 빈곤이 심각하다"며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부끄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들이 제안한 '백만장자세(Millionaires Tax)'는 1년에 66만5000달러(약 7억6000만원) 이상을 벌어 미국 소득 상위 1%에 들어가는 뉴욕주의 부자들이 대상이다. 22억달러(약 2조5000억원)의 세금을 더 걷을 수 있게 된다. 미국 부자들이 이런 주장을 한 것이 처음도 아니다. 지난 2011년 '투자의 귀재'로 불리는 워런 버핏은 연간 100만달러 이상 버는 부자들에게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는 '버핏세'를 주장했다.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고 했던 경주 최부잣집 얘기로 위안을 삼아보려 했는데, 너무 옛날 일이라 초라하다. 백만장자들이 스스로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하면 세상은 분명히 지금보다 따뜻해질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