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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카에게 주말마다 영어를 가르친 지 4년쯤 됐다. 영어 듣기와 말하기는 엄두를 내기 힘들지만, 조카의 독해력을 키우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자청했다. 자연스럽게 공부는 구문과 문법, 단어 등 '성문종합영어'식으로 진행된다. 처음엔 4형식과 5형식 문장도 모르던 녀석이 지금은 관계대명사의 주격(主格)과 목적격, 현재분사와 동명사의 차이를 척척 구분하는 모습에 내심 뿌듯하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조카가 하루는 잔뜩 풀이 죽어서 왔다. 자신보다 진도를 앞서나가는 친구가 학교에 적지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공부하는 영어 교재도 30년 전에는 고교에 입학한 뒤에야 배웠던 수준이다. 가끔은 수능 기출 문제를 변형한 문장이 나와서 어른들도 사전(辭典) 없이는 독해에 애를 먹는다. 선행 학습의 진도가 적어도 3~4년은 앞당겨진 셈이다. 그런데도 이보다 앞서간다면 중학교에 갓 입학한 친구들이 도대체 뭘 공부하고 있는 걸까. 가끔 토익과 토플 고득점자도 나온단다.

이쯤 되면 예습이나 선행 학습이 아니라 거의 '묘기' 수준이다. 과거 공산권 아이들이 고난도의 기계체조를 해낸 뒤 환하게 미소 짓던 모습에서 느꼈던 오싹한 한기(寒氣)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기자 역시 기계체조의 코치이자 입시 지옥의 공범(共犯)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도통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출산과 학생 수 감소에 학급당 정원이 줄어들고 학교 통폐합을 추진한다는 뉴스가 나온 지 오래다. 대학들이 신입생 유치에 전전긍긍한다는 소식도 더 이상 새롭지 않다. 그런데도 대학 들어가기는 여전히 어렵고, 입시 경쟁과 선행 학습 열기도 식을 줄 모른다. "한 가지만 잘해도 대학 갈 수 있다"던 어느 전직 장관의 호기로운 백지수표는 부도수표가 되어 나뒹군다. 학생생활기록부와 수능, 경시대회와 봉사활동까지 모든 걸 허겁지겁하려다 보면 숨이 찰 지경이다.

1970~80년대 대학 교육을 받은 양질의 노동 인력은 고속 성장의 동력(動力)이었다. 하지만 경제성장의 엔진은 차갑게 식고 있고 '청년 실업'은 두 자릿수에 육박한다. 한편에서는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과 '인구론(인문계 90%는 논다)'을 부르짖는데도 다른 한편에서는 입시 정책 발표에 여전히 사회 전체가 들썩거린다. 이 기묘한 불균형은 극심한 인지부조화(認知不調和)를 일으킨다. 기성세대의 불안감이 혹시 미래 세대의 상상력을 옥죄고 성장판까지 닫아버리는 건 아닐까.

고심 끝에 이런 위로의 말을 떠올렸다. "외삼촌은 중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사과(apple)'의 철자도 제대로 몰랐고, 관계대명사의 용법은 중학교에 들어가고 한참 뒤에야 배웠단다. 만약 30년 전에 외삼촌이 너 같은 아이를 학교에서 만났다면 두려워서 쩔쩔맸을 것 같구나." 하지만 순진한 조카 녀석도 이런 위로가 별반 도움이 안 된다는 것쯤은 알 것이다. 아이의 근심 어린 얼굴을 보고 있자니 우리 세대가 지금 아이들에게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 한없이 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