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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불교 그림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내게 전국 이름난 산에 자리한 큰 절들은 '제2의 도서관'이었다. 그런데 자료 조사하러 절에 찾아가면 그림 말고 다른 미술품은 눈에 잘 안 들어왔다. 논문 주제가 아닌 것에 관심을 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천왕문 안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이다. 4m가 넘는 네 명의 장수가 문 양쪽에서 눈을 부릅뜬 기세에 그만 압도당했다.

눈은 왕방울만 하고 콧구멍은 아이 주먹이 들어갈 만큼 뻥 뚫려 있고 하마 같은 큰 입은 굳게 닫거나 하얀 치아를 몽땅 드러냈다. 눈썹과 콧수염, 턱수염은 흰색, 회색, 검은색, 푸른색 등으로 온갖 멋을 부린 사천왕의 네모난 얼굴은 호탕한 기운 그 자체였다. 이만큼 당당하면서도 익살스러운 얼굴은 만난 적이 없었다. 이렇게 용맹한 장수가 머리에 쓴 것은 꽃으로 예쁘게 장식한 화관(花冠)이라니.

갑옷을 잘 차려입은 천왕들은 두툼한 손가락으로 비파를 튕기거나 푸른 장검을 겨누거나 용과 여의주를 잡거나 삼지창을 잡고 탑을 받치는 등 각자 열심이었다. 손만 바쁜 게 아니었다. 아래를 보니 천왕들이 두 발로 악귀들을 지그시 누르는 것이 아닌가. 하나같이 귀엽고 천진난만한 얼굴을 가진 개구쟁이여서 자기 몸보다 더 큰 발에 눌려도 별로 고통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런 흥분과 재미에 빠져 여러 절의 사천왕상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조선시대 것이 아닌 요즘 만든 사천왕을 만났다.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사천왕이건 악귀건 무섭고 기괴하여 두 번 쳐다보고 싶지 않았다. 여유와 위엄, 웃음이 사라진 저 얼굴은 지금 우리 마음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닐는지.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순 없다. 옛날의 뛰어난 사천왕상을 자주 보고 익혀 가슴에 담는다면 우리 시대의 사천왕도 굳세면서 온화한 기운을 뿜을 수 있을 것이다. 나름대로 꼽아본 조선 사천왕상의 '베스트'가 있다.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여수 흥국사. 모두 전라남도에 있는 절이니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사천왕상 순례 여행을 떠나보는 것도 좋겠다.

탁현규·간송미술관 연구원 기고자 : 탁현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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