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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가발 수출 회사 정풍물산의 문정광 회장이 집 설계를 맡은 서른 살 건축가와 대화하다 갑자기 눈시울을 붉혔다. "나라가 돈 없으니 우리 딸들 머리카락 팔아 외화 벌이 합니다. 나라가 힘없으니 이렇게 돈을 벌어요." 노(老)사업가의 눈물을 보며 홍안(紅顔)의 건축가는 결심했다. 건축으로 부강한 조국 만드는 데 한평생 바치겠다고. 언젠가 우리의 도시 노하우를 수출하겠다고.

여의도, 서울대 관악 캠퍼스, 경주 보문단지 마스터플랜, 예술의전당, 베네치아 비엔날레 한국관 설계 등 1960~1990년대 중요 건축 프로젝트를 맡았던 건축가 김석철(73) 명지대 석좌교수(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장)가 12일 별세했다. 그는 10여년간 위암, 식도암, 두경부암과 싸우면서도 치료받는 시간을 빼고는 현장을 지켰다. 그의 측근은 "세상 뜨기 전날 밤도 설계 도면과 씨름하셨는데, 심부전으로 갑자기 쓰러지셨다"며 애석해했다.

1943년 함경남도 안변 출생으로 경기고와 서울대 건축과를 졸업한 뒤 한국 현대 건축의 1세대를 이끈 건축가 김중업·김수근 밑에서 건축을 배웠다. 1970년 '현대건축'을 창간해 주간을 지냈고, 1972년 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을 설립했다. '한국건축문화 대상'(1982) '아시아건축사협회상 금상'(2000) '올해의 건축인상'(2004)을 받았다. 2013년 아픈 몸으로 제3기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을 땐 "지경학(地經學)적으로 한반도의 '공간 경영'이 정말 중요한 때"라며 "국가를 위해, 우리 건축을 위해 내 여생(餘生)을 바치겠다"고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집 짓는 일보다 '도시' 짓는 일에 더 관심이 많았다. 1960년대 말 시작된 여의도 프로젝트가 대표적이다. "여의도를 만들 때 보행 공간과 차도를 분리하는 게 목표였는데 원안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차들의 도시가 됐다"며 아쉬워하기도 했다. 우리 도시에서 익힌 마스터플랜 경험을 바탕으로 쿠웨이트 자흐라 신도시, 베이징 경제특구 계획에도 참여했다.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형이다. 유족으로 아들 영재(아키반건축도시연구원 실장), 딸 국희·혜원·영나씨, 사위 박창근(강원대 도시건축공학부 교수)·노영진(영진본 정형외과 원장)·육종윤(KT 차장)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발인 15일 7시. (02)2072-2091

기고자 : 김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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