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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배 기자가 초년병 시절 한국은행을 취재하다 본점 금고를 관리하는 직원과 저녁을 먹었다. 직원은 쇠줄로 만든 허리띠에 묵직한 철제 열쇠를 매달고 나타났다. 선배가 "그게 뭐냐"고 묻자 그는 "본점 금고 열쇠인데 잃어버릴까봐 이렇게 차고 다닌다"고 했다. "담당 직원들이 지닌 열쇠를 모두 모아야 금고 문을 열 수 있다"고도 했다. 오래전 얘기여서 한은에 "요즘엔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보안 사항"이라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아직도 한은 본점에 금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한은 앞 분수대 아래 금괴가 묻혀 있다더라"는 말도 나돈다. 사실이 아니다. 한은은 6·25 때 금고에 있던 금괴 260㎏을 부산으로 옮기다 북한군에 빼앗겼다. 그 뒤로 대구지점에 금을 보관하다 12년 전 아예 영국 중앙은행에 맡겼다. 그래서 한은 금고엔 현금뿐이지만 금고가 어떻게 생겼는지 보고 싶기는 마찬가지다.

▶영화 '범죄의 재구성'에서 시중은행 직원을 사칭한 사기꾼들이 위조 수표를 내보이고 한은 금고까지 들어가 현금을 받아낸다. 영화 속 금고는 이중, 삼중 철문에 전자 보안 장비를 갖췄고 경비원이 출입문마다 있다. 그런데도 위조 수표 한 장에 간단하게 뚫렸다. 이 영화는 실제 사건을 본떴다. 1996년 사기꾼 두 명이 한은 경북 구미지점에 위조수표를 내고 9억원을 받아 달아났다.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다. 감추고 싶은 일이 영화에 나오는 걸 막으려고 한은 사람들은 영화사에 "은행 이름만이라도 빼달라"고 했지만 허사였다.

▶한은 금고엔 외부인이 접근할 수 없다. 구미 사건 이후 수표를 현금으로 바꿔주지도 않는다. 은행들은 한은 전산망에 자금 인출 계획을 미리 알리고 돈을 찾는다. 한은 본점 금고는 지하 깊은 곳에 있고 은행 발권국 직원 몇이 돌아가며 지킨다. 은행들이 필요할 때 찾아 쓸 현금에다 시중에 새로 풀 화폐까지 보관해야 해 금고 속에는 10조원 넘는 거금이 들어 있다. 더 알고 싶어 한은 담당자에게 금고 얘기를 꺼냈다. 정색하며 "위치·규모·경비까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한국은행 본점이 내년 6월 태평로 삼성 본관으로 옮겨 간다. 60년 넘은 별관을 새로 짓고 30년 된 본관도 보수하기 위해서다. 금고 속 현찰도 강남지점으로 옮겨야 해 간부들이 벌써부터 머리를 싸매고 있다. 본점 금고 자금을 모두 옮기기는 6·25 이후 처음이다. 10조원 넘는 수송 액수는 건국 이래 최대다. 화물차 몇백 대를 동원해도 모자란다. 영화에서도 못 볼 현금 수송의 '장관(壯觀)'이 어떻게 벌어질지 궁금하다. 기고자 : 김태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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