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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3일(현지 시각) 오전 프랑스 파리7대학(디드로 대학). 벤치에 앉아 영어 문제집을 채점하던 이 대학 3학년생 라니아(22)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목표 점수를 받기엔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며 "내달 토익 시험에서 750점 이상을 받아야 하는데, 중간고사 기간이라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했다. '왜 토익을 준비하느냐'는 질문엔 "토익 점수가 좋아야 해외 취업이 쉽다"며 "영어를 쓰지 않는 나라를 가더라도 일단 영어는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캠퍼스 곳곳에서는 라니아씨처럼 외국어를 공부하는 학생을 만날 수 있었다. 아시아 유학생들로부터 중국어나 일본어 과외를 받는 학생들도 볼 수 있었다.

영어를 '영국말'이라 부를 정도로 모국어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프랑스 대학생들이 외국어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다. 청년 실업률이 매년 증가하면서 일자리를 구하기가 어려워지자 2~3년 전부터 해외 취업을 위해 외국어 공부를 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 이전에는 파리 정착이 어려웠던 외국어학원도 성업 중이다.

파리4대학(소르본 대학) 인근의 한 영어학원에서 만난 로라(24)씨는 "처음엔 미국에서 온 유학생에게서 개인 과외를 받았지만, 빨리 비즈니스 영어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선택했다"고 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하는 그는 올 6월 인턴십을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그는 "프랑스에선 제대로 된 정규직 일자리를 찾을 수가 없다"며 "영국에서 일자리를 정착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EU 통계청에 따르면 프랑스의 청년 실업률은 2008년 이래 20%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최근 5년간은 계속 증가해 2015년 24.7%를 기록했고, 올 2월엔 25.9%를 찍었다. 이웃 나라 독일(7.2%), 스위스(8.6%), 영국(14.6%) 등보다 훨씬 높다. 높은 실업률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 청년들은 해외로 떠나고 있다. 정부에 등록된 외국 거주 프랑스인은 공식적으로 170만명이지만, 실제로 외국에 사는 프랑스인은 30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프랑스 정부는 보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유럽 대학 내 학생 교류 프로그램을 통해 외국에 나간 뒤 귀국하지 않고 정착을 시도하는 학생이 많다"고 했다.

외국 취업을 꿈꾸는 학생이 많아지면서 빛을 보는 곳이 외국어 학원이다. 한 미국계 유명 영어학원은 파리에만 6개의 지점을 두고 있다. 프랑스 대학생들은 학원보다 개인 과외를 선호하지만 단기간에 외국어를 배우려는 사람이 늘면서 학원 체인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다. 영어학원 관계자는 "한동안 프랑스에서 고전했는데, 3년 전부터 수요가 크게 늘었다"며 "파리뿐 아니라 리옹·니스에도 새로 지점을 냈다"고 했다.

프랑스 청년들이 가장 선호하는 나라는 스위스와 영국, 독일 등 실업률이 낮은 곳들이다. 프랑스어와 영어, 현지어까지 3가지 언어를 할 수 있으면 수월하게 취직할 수 있다.

반대로 유럽 다른 국가에서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로 건너오는 청년들도 있다. 이탈리아 국적의 여행사 직원 세베로(27)씨는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 영어를 모두 할 줄 안다는 강점을 살려 프랑스에서 취직했다. 프랑스 매체들은 이런 현상에 대해 "일자리가 부족한 유럽 국가들이 구직자를 서로 공유하고 있는 셈"이라고 평가했다.

아시아에서 활로를 찾기 위해 한국어나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는 학생들도 있다. 학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마리옹(24)씨는 석사과정에선 중국어를 선택했다. 그는 "유럽에 정착하는 것이 편하지만, 성장 가능성을 생각하면 중국이 훨씬 낫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서 마케팅 일을 하는 프랑스 출신 마직스(23)씨는 한국행(行)을 고민하고 있다. 대학생 때부터 틈틈이 한국어를 배웠다는 그는 "이탈리아 경기가 나빠지고 있어 한국으로 재(再)이주할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청년들의 외국 취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외국에서 정규 일자리를 얻지 못하고 불안정한 생활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프랑스 일간지 르피가로는 "외국에서 제대로 정착을 하지 못해 보험이나 사회보장 혜택을 받지 못하는 청년이 적잖다"고 보도했다.

[그래픽] 프랑스 최근 5년간 청년 실업률(15~24세) / 유럽 국가 2015년 청년 실업률(15~24세) 기고자 : 최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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