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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거 지음｜김항 옮김｜창비｜252쪽｜1만4000원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겪은 일이다. 지하철역 승강장에 나란히 두 줄로 서 있는 사람들의 맨 뒤에 서 있었다.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예상치 못했던 일이 다음에 벌어졌다. 열차 문이 열리자마자, 줄에 서 있던 사람들이 객차 안으로 질주했다. 지금까지는 '연기'에 불과했고, 빈자리를 놓고 벌이는 이 경쟁과 무질서함이야말로 중국의 실체가 아닐까 생각했다. 올림픽과 엑스포를 치르고 자국 기술로 우주선을 쏘는 나라지만, 여전히 후진성이 남아 있는 나라. 이런 중국에 대한 외부의 평가에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사상사 전문 연구자이자 동아시아를 지적(知的) 화두로 삼고 있는 저자 쑨거(孫歌·61)는 서구적 관점에서 그려진 중국 상(像)과는 다른 중국을 보여준다. 그는 다양한 서민들의 일상을 그려내는 방식을 통해 '제3자'일 수밖에 없는 외국인의 눈에는 포착되지 않던 중국적 삶의 속살과 내면의 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예를 들어 중국 중소기업이 만드는 값싼 IT 관련 모조 제품을 뜻하는 '산자이반(山寨版)'에서 저자는 중국인들의 실용적 세계관을 읽어낸다. 산자이는 '짝퉁'과 다르다. 유명 브랜드의 외양만 흉내 낼 뿐 자신들의 기술력으로 원가와 가격을 낮춰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중국 소비자들의 욕구를 충족시켜 줬다. 소수 집단이 유명 제품을 독점하는 것에 맞서 보통 사람들이 자기 방식으로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을 보며, "중국적 권리의식과 서민의식이 자라고 있다"고 분석한다. 아이폰의 '산자이'로 시작해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한 '샤오미'는 그 충분한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사회 개조를 목표로 한 악명 높은 프로젝트였던 '문화혁명'이 개인의 삶에는 전혀 다른 흔적을 남길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저자는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 시골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고, 문혁으로 10년간 중단됐던 대학 입학시험이 재개된 1977년에 대학에 들어간 이른바 '77기'다. 그는 "청춘시대가 단련된" 시절의 곤궁했던 삶에 향수마저 보인다. 농민·노동자들의 삶이 보여주는 '건강함'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며, "몇십 년이라는 시간은 역사에서 단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인간에겐 거의 한평생이다. 중국 노동자는 역사의 변동에 휘둘리면서도 완강한 생명력을 단련시켜왔다"고 말한다. 저자 역시 친구가 하방(下放) 시절에 만난 농민들을 고용해 이런저런 집수리를 맡기는 등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그는 "중국의 역사는 왕조 교체로 이뤄져 있지만, 왕조의 몰락으로 중국이 망한 적은 한 번도 없다. 평범한 생활인인 중국 민중이 늘 자기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라고 자부(自負)한다.

중국은 서구 언론을 통해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않는 정치적 후진국이라는 이미지로 비친다. 하지만 저자의 눈에는 이것도 서서히 극복되어 가고 있다. 타이완 기업 '폭스콘'에서 발생한 연쇄 자살 사건은 "싼 노동력이었던 중국 노동자들이 이제 스스로 '어눌한 함성'을 내뱉는" 계기가 됐다. 대도시를 중심으로 수만 명이 모여 함께 걷는 새로운 시위방식인 '싼부(散步·산보)'도 등장했다. 2007년 샤먼(厦門) 정부가 화학공장 건설을 결정했을 때 시민들이 싼부로 이를 무력화시킨 이래 중국에선 상하이, 청두(成都), 충칭(重慶) 등으로 싼부가 퍼져 나갔다.

이 책을 통해 저자는 결국 '언제까지 서구식 인권과 민주주의의 잣대로만 중국을 하등 사회로 볼 것이냐'고 우리에게 묻는다. 이런 기준으로만 따지면 지금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놓칠 우려가 크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중국 지배층의 자기 합리화에 이용당할 위험도 크다. 자신들의 요구를 집회가 아닌 '싼부'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현실적 제약은 여전히 엄존하기 때문이다. 책은 2009~2014년에 일본 잡지에 발표된 글을 묶어 일본에서 지난해 출간됐다.

기고자 : 신동흔
본문자수 : 1968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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