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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 지음｜푸른역사｜680쪽｜3만8000원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가 그리도 좋더냐."

1913년 조중환의 번안 소설 '장한몽'에서 연인 심순애를 향해 이수일이 내뱉는 대사다. 이처럼 '장한몽'은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처럼 민망하고 극단적인 설정으로 가슴 밑바닥을 긁듯이 슬픔을 자극해서 신파(新派) 소설의 대명사로 불린다. 하지만 문화평론가인 이영미(55) 성공회대 초빙교수는 신파성이라는 잣대를 통해 한국 대중문화 100년사(史)를 살핀 이 책에서 정색하고 질문을 던진다. '새로운 유파'라는 사전적 정의가 일러주듯 신파는 1910년대 도입 당시에는 "매우 새롭고 세련된 새로운 미감(美感)"이었다는 것이다. 조선 후기의 판소리가 보여주듯이, 우리 전통 공연 예술에서는 비극성도 해학적 웃음과 함께 버무려 넣는 경우가 많았다. 비애와 해학을 수시로 넘나들면서 웃음과 울음을 동시에 선사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전통이었다.

반면 1910년대 일본 원작 소설을 번안한 신파극 공연장은 '비읍장(悲泣場·슬피 우는 곳)'이라고 불릴 정도로 눈물을 쥐어짜내는 최루성(催淚性)으로 일관했다. 당시 신파성은 "1910년대 도시의 고학력자와 중상류층 사이에서 큰 호소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뒤마 피스의 소설 '춘희(椿姬)' 역시 신파조의 기생 이야기로 번안되어 라디오 드라마와 음반으로 제작될 만큼 인기가 높았다. 힘들게 남자를 뒷바라지해서 출세시켰지만 버림받고 마는 기생이나 시집에서 괄시를 받고 쫓겨난 뒤 철길에 뛰어들어 죽음을 택하는 며느리 이야기는 당시 신파극의 단골 소재였다.

물론 신파극 등장 이면에는 1910년 국권 상실의 충격과 비탄이 깔려 있다. 저자는 등장인물들이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기보다는 스스로 체념하고 굴복하는 무력함으로 일관하는 모습을 신파성의 특징으로 꼽는다. 신파극에 "모두 제 잘못이에요"라는 대사가 자주 등장하고, 트로트 가요에 "차라리 만나지 말 것을" 같은 패배적 정서가 두드러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참고 문헌을 포함해 680쪽에 이르는 이 책은 영화와 드라마, 가요와 만화 등 대중문화의 장르를 거침없이 넘나들면서 신파성의 탄생과 발전, 변화와 쇠퇴 과정을 살핀 노작(勞作)이다. 기존 문화 연구의 성과와 한계를 살피고 있는 초반 50쪽은 다소 추상적이다. 하지만 이 초반부를 건너뛰면 일본강점기의 신파극부터 1980년대 이현세·허영만·박봉성의 만화와 1990년대 '모래시계'와 '여명의 눈동자' 같은 TV 드라마까지 한국 대중문화 100년사의 명장면들이 쉴 새 없이 펼쳐진다.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대중문화의 신파성에도 일대 변화가 생긴다. 1950년대 욕망에 새롭게 눈을 뜬 '자유부인'(정비석 소설)의 등장과 1960년대 최희준의 '하숙생' 같은 스탠더드 팝의 인기로 신파성도 위기를 겪는다. 특히 1960~1970년대 대도시의 고학력 젊은이들이 주도한 청년 문화의 부상(浮上)으로 '신파'는 청산의 대상이 되기에 이른다. 트윈폴리오의 포크 송 '하얀 손수건'(1969년)을 듣거나 이장호 감독의 영화 '별들의 고향'(1974년)을 보는 것이 최신 유행으로 떠오른 것이다. "눈물로 흔들어주던 하얀 손수건"이라는 노랫말이 보여주듯 당시 대중은 극도로 절제되고 응축된 슬픔을 선호하게 됐다. '별들의 고향'에서도 여주인공 경아의 슬픔은 울부짖는 통곡보다는 장난기 어린 철부지의 징징거림에 가깝다.

1980~1990년대 신파성은 드라마와 가요에서 패러디와 차용의 대상으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단조 트로트의 선율로 하층민 일가족의 일상을 노래한 인디 록 음악이나 민중가요가 대표적인 예다. '여명의 눈동자' 역시 등장인물 구도는 '장한몽'의 신파적 구도를 가져온다. 첫사랑이지만 남편감으로는 불안한 최대치(최재성)가 이수일이라면, 체제 내에서 여성을 보호해줄 능력이 있는 장하림(박상원)은 김중배의 변용(變容)이다. 그 사이에서 갈등하는 윤여옥(채시라)이야말로 어쩌면 심순애의 모습일 것이다. 이런 신파적 구도에도 1990년대 드라마 주인공들은 세상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는 길을 택한다.

급격한 산업화 과정에서 체념과 회한의 신파극을 대신하는 것이 분노와 폭력의 복수극이다. '강한 것이 아름답다'는 이현세의 만화가 보여주듯이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논리가 대중문화의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저자는 "요즘 사람들은 세상의 억압을 윤리가 아니라 힘의 문제로 받아들인다"면서 "앞으로도 신파적 흑흑거림보다는 복수나 테러, 폭력 같은 방식으로 표출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점친다. 눈물 대신 복수라는 뜻일 텐데, 과연 대중문화에 비친 우리는 행복해지고 있는 걸까.

기고자 : 김성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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