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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총선 직후 제주도를 시작으로 경기도·부산·대구·충남 등 5개 시도를 돌면서 그 지역 광역지자체 단체장과 인터뷰를 했다. 이들은 모두 여의도 정치에 뿌리를 둔 직업 정치인이지만, 인터뷰에선 차기 대선 등 중앙 정치 이슈는 쏙 빼고 자신들의 경제 산업 전략을 열심히 설명했다.

원희룡 제주지사는 '탄소 제로 아일랜드' 제주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를 놓고 열변을 토했고, 남경필 경기지사는 판교에 자율 주행 전용 도로를 건설할 아이디어를 소개했다. 서병수 부산시장은 물류 도시에 첨단 ICT(정보통신 기술)를 입히는 정책을 소개했고, 권영진 대구시장은 아예 '대구를 전기자동차 산업 테스트베드(실험대)로 내놓겠다'고까지 말했다. 안희정 충남지사는 '충남의 이슈가 대한민국의 이슈"라면서 구체적 성과보다 근본적 문제 해결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통적으로 선출직 지자체 단체장은 기업 유치나 대형 이벤트 개최와 같이 단기 성과에 매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2014년에 당선된 광역 단체장들은 전기자동차, 인공지능, 자율 주행 등 첨단 트렌드를 수용하는 데 중앙정부보다 더 적극적이다. 지역 경제 활성화 책임자로서 절박하기까지 하다. 이들은 또 혁신을 위해 기존 이념 틀이나 정당 대결 구도를 뛰어넘어 필요한 사람이라면 모두와 손을 잡는 협치(協治)를 추구한다.

물론 지자체 단체장들이 다음 선거 또는 향후 정치 행보를 염두에 두고 화려하고 멋있게 보이는 전략을 짠 점도 있다. 실제 일부 혁신 정책은 지자체 차원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국가 차원 어젠다여서, 임기 내 구체적 성과를 내기가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지방 정치 지도자들의 실험과 도전을 21세기 한국 리더십의 새로운 대안으로 눈여겨봐야 한다.

미국의 정치 평론가 데이비드 오즈번은 1988년 '민주주의 실험실(Laboratories of Democracy)'이라는 저서에서 마이클 두카키스 등 주지사 6명의 정책 실험을 소개하면서 지방 정치가 국가 전체에 불어넣은 활력을 분석했다. 오즈번은 이들이 교육, 일자리, 의료 복지 등 국민이 피부로 느끼는 현실 문제를 연방정부나 의회와 다르게 다루면서 새로운 리더십을 개척했다고 봤다. 오즈번의 책에 등장했던 빌 클린턴 아칸소 주지사는 42대 미국 대통령직에 올라 주지사 시절에 쌓은 문제 해결 능력을 연방정부에 적용함으로써 미국의 새로운 전성기를 열었다.

한국의 현 상황은 미국의 80년대와 비슷한 면이 있다. 당시 미국 중앙 정치는 실업 등 민생 문제 해결에 무력했고 미국 산업 경쟁력은 '메이드 인 재팬'의 위협을 받기까지 했다. 한국도 여의도 정치가 선진화법의 늪에 빠져 있고, 세종시에 갇힌 엘리트 관료들의 사명감과 실력은 예전 같지 않다. 게다가 재계 2·3세가 이끄는 산업계 리더십은 윤리·실력 등 모든 면에서 상처투성이다.

한국 사회는 지방 리더들의 행보를 더 주목해야 한다. 때로는 지지와 격려를 보내고, 때로는 이들의 실험을 놓고 국가 차원의 토론에 부쳐보자. 노동법 개정과 같은 법률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산업 구조조정 속도를 내지 못하는 중앙 정치를 보면 답답하기 그지없다. 지방 리더들의 실험에 희망을 걸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