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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근육 좀 키워보려고 헬스클럽 운동 기기에 앉았다. 무거운 철(鐵)을 들어 올리려는데 기구에 붙은 성조기가 도드라져 보인다. 주먹만 한 국기 옆에 이런 문구가 굵게 적혔다. '버지니아주(州)에서 만든 자랑스러운 미국산.' 다른 나라가 주문 제작할 때는 보일락말락 하게 쓰던 '메이드 인' 표시를 미제(美製)라고 보란 듯이 크게 새긴 모양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거침없는 하이킥' 때문일까. 요즘 이런 사소한 표지 하나도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트럼프는 멕시코 국경에 장벽 설치를 선포하고, 이슬람 나라 사람들을 몰아내고, 공들여 조직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해체해버렸다. 취임하고 고작 한 주만이다. 진작부터 분열 조짐을 보여온 유럽이 질세라 벽을 더 높이 세우고, 여기에 중국까지 칼을 꺼내 휘두르면 한국 같은 작은 나라는 어찌 버텨야 할지 답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런 난세가 100년 전에도 있었나 보다. 영국 가디언이 연초에 '역대 최고의 논픽션' 중 하나로 꼽은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책 '평화의 경제적 결과'(1919년)를 지난 연휴 때 읽다가 여러 번 밑줄을 그었다. 영국 경제 관료였던 케인스는 제1차 세계대전 배상 문제를 논의한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했다가 정치인들이 이기적인 자국 정치 논리를 앞세워 경제를 깔아뭉개는 무책임한 행태에 경악했다. 책은 그 분노 속에 썼다.

그는 패전국 독일에 말도 안 되게 막대한 배상금을 부과하겠다는 당시 국제 정세를 '매우 중요한 사안에 대한 굉장히 비현실적인 결정'이라고 요약하며 책을 시작한다. 그는 회의가 황당한 결론으로 자꾸 치닫는 원인을 명료하게 지목한다. '불행하게도 정치적 계산이 경제적 판단을 처참하게 베어버렸다.' 선거를 앞두고 정적(政敵)부터 짓밟아야 했던 당시의 정치인들은 '개인의 행복이 아닌 집단적 증오에 집착했다'고 그는 적었다.

이런 '정치적 무모함의 극치'는 역사상 가장 끔찍한 전쟁인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케인스는 한탄한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정치가 아니라 금융과 경제라는 사실을 한 사람이라도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그리고 당부한다.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흐름을 이로운 쪽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라고.

죽은 경제학자의 한숨이 지난 설 연휴 마지막 날 TV 속 어지러운 뉴스들과 겹쳤다. 트럼프의 사나운 표정에 이어 한국 경제부총리가 보였다. 한국이 환율조작국으로 지정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할 것"이라고 자신하면서 미국 제품을 더 수입해 미국에 잘 보이는 게 전략이라고 했다. 다음번 대통령 하겠다고 손든 이들이 내던지는 경제 구호는 중구난방 이어진다. 케인스는 경제학자를 치과 의사에 빗댔다. 이(齒)가 얼마나 상할지 예측하긴 어렵겠지만 적어도 이가 안 썩는 방법은 알려줘야 한다는 뜻이다. 치통은 격해지는데 미숙한 치과 의사 앞에 앉은 듯한 이 불안, 나만 느끼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