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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펜 선이 촘촘하게 포개지며 추억의 세월을 담아낸다. 슬레이트 지붕을 한 단층 건물 유리 출입문에는 '담배' '간첩신고113' 같은 문구가 보인다. 구멍가게다.

20년 가까이 전국 구멍가게를 그려온 이미경(47·사진) 작가가 최근 '동전 하나로도 행복했던 구멍가게의 날들'(남해의봄날)을 펴냈다. 1998년부터 최근까지 그린 펜화 200여점 중 80여점을 골랐고, 그림에 얽힌 사연을 풀어냈다. 2일 서울 강남 한 갤러리에서 그를 만났다.

2017년 한국은 편의점 공화국이다. 편의점으로 퇴근한다는 '편퇴족'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구멍가게가 24시간 편의점에 밀려난 것도 오래전의 일. 이 시점에 구멍가게라니. 이미경 작가는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제자리에서 자기 일을 묵묵히 하는 것의 가치를 주장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가게를 찾아가면 50년 넘게 가게를 지켜온 주인분들이 계셔요. '고작 이거 하려고 살았나'라는 시선도 있을 테지만, 저는 한 가지 일을 꿋꿋하게 오래 해왔다는 게 가치 있다고 생각했어요. 왜 구멍가게 같은 '꼬질꼬질'한 그림을 그리냐는 주변 시선 속에서, 저 자신에게 건네는 메시지이기도 했지요."

홍익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둘째 아이를 낳고 붓을 놓았다. 유화물감 냄새가 힘들었고, 작업 공간도 마땅치 않았다. 잠시 서울을 떠나 경기도 퇴촌에서 5년 동안 살다가 한 구멍가게를 발견하고는 펜을 들 수 있었다. "해 질 무렵 적갈색 양철 지붕이 노을에 휩싸이면서 낯선 조형미를 느꼈어요. 구멍가게는 필름 아까워서 사진도 안 찍던 시절인데 이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죠." 이미경 작가는 이후 20년 동안 전국을 돌아다니며 구멍가게를 그렸다.

초등학생 당시 구멍가게에서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힘이 됐다. 구멍가게에서 친구와 함께 밤늦게까지 '신발 감추기'를 하며 놀았던 기억, 친구 부모님이 운영하는 구멍가게에서 친구와 함께 과자를 까먹으며 가게를 보았던 기억도 생생하단다.

스스로 '상업 미술'이라고 단정하지만 품은 많이 든다. "대학에서 단색화 그리던 시절에는 100호 사이즈 그림을 하룻밤에 4점까지 그리기도 했어요. 지금은 펜화를 하다 보니 작은 그림 하나 완성하는 데도 나흘 밤낮이 우습죠. 다작(多作)이 어렵다 보니 책을 통해 제 그림을 더 많은 분이 보셨으면 하는 욕심도 있었어요."

구멍가게를 사실보다 조금 더 아름답게 묘사할 적도 있다. 알루미늄 섀시를 상상력을 발휘해 나무 문틀로 바꿔 예스럽게 그리기도 하고 실제로는 없는 아름드리 나무를 그려넣기도 한다. 한번은 서울시에서 그림 속 가게를 근대문화유산으로 선정하고 싶으니 가게 위치를 알려달라고 했다가 실망하고 돌아가기도 했단다.

그녀의 구멍가게에는 거의 예외 없이 평상과 우체통이 있다. "평상은 낯선 사람끼리도 함께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죠. 실제로 구멍가게에 평상이 많기도 하고요. 옆집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도시와는 정반대죠. 우체통은 SNS 시대에 편지 같은 아날로그적 소통이 필요하다는 의미를 담았어요."

그는 "수직에서 느껴지는 경쟁과 성공 지향의 이미지와 엄숙함, 숭고함이 낯설다"고 책에 썼다. 대부분 단층인 구멍가게 그림은 수평적이고 그래서 따스하다. 20년을 바친 이유를 알 것도 같다. 다만 무작정 그림 속 구멍가게를 찾아 나서면 곤란할 수도 있겠다. 4분의 1만 영업 중일 것이라고 한다. "우리 정서는 낡은 것 보면 갈아엎고 새롭게 만드는 걸 선호하잖아요. 오래된 것에 대한 정겨움, 소중함을 사람들이 한번 되돌아봤으면 합니다. 편의점 세대인 아이들도 이 책을 보며 구멍가게의 정(情)을 알았으면 좋겠어요."

기고자 : 양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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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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