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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9일 오후 5시 30분쯤 서울 강남구 논현동 한 빌라 1층 주차장에서 이 건물에 살던 이모(여·35)씨가 피투성이로 발견됐다. 이웃의 도움으로 병원으로 옮겨진 이씨는 두개골이 완전히 골절된 상태였다. 혼수상태였던 이씨는 사흘 뒤 숨졌다. 경찰 조사 결과 이씨를 살해한 사람은 이씨의 전 남자 친구 강모(33)씨였다.

두 사람은 재작년 12월부터 사건이 일어난 빌라에서 1년 동안 함께 살았다. 유흥업에 종사하던 강씨의 사무실이 빌라에서 가까웠고 두 사람은 월세를 나눠 냈다. 이웃들에 따르면 이들의 집에서는 물건 던지는 소리, 울음소리 등이 자주 들려왔다고 한다. 빌라 근처에서 이씨가 강씨에게 폭행당하는 모습을 목격한 이웃도 있었다. 견디다 못한 이씨는 작년 12월 헤어지자고 했고 강씨는 빌라에서 짐을 뺐다. 그러나 이별 직후 강씨는 이씨에게 다시 만나자고 했다. 하지만 이씨는 강씨를 피했고 한번 만나자는 요청도 거절했다.

이들이 헤어진 지 한 달쯤 된 지난 1월 9일 오후 2시 30분쯤 강씨는 이씨의 집을 찾아왔다. 강씨는 수십 분 동안 욕설을 하며 "직접 얼굴 보면서 이야기하자"고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어주지 않자 강씨는 예전에 알고 있던 현관문 비밀번호를 입력해 이씨의 방으로 들어갔다. 이씨는 바로 경찰에 신고했고 강씨는 경찰서로 연행됐다. 하지만 경찰은 두 사람이 1년간 동거한 연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강씨에게 "다시는 이씨 집에 찾아가지 마라"고 경고한 뒤 강씨를 풀어줬다. 이씨에게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바꾸고 강씨가 다시 접근하면 곧바로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2시간 만에 강씨는 이씨 집을 다시 찾았다. 강씨는 이씨를 설득해 주차장으로 불러냈다. 강씨는 "다시 만나자"고 거듭 요구했다. 이씨가 거절하자 강씨는 준비해 간 흉기로 위협하며 이씨를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했다. 이씨가 주차장 바닥에 쓰러지자 강씨는 몸을 수차례 걷어찼고 머리를 짓눌러 밟았다. 이씨가 축 늘어진 상태가 되고 나서야 강씨의 폭행은 멈췄다. 강씨는 피투성이가 된 이씨를 남겨둔 채 외투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는 느린 걸음으로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CCTV에 목격됐다. 경찰은 이튿날 새벽 강씨를 살인 혐의로 체포했다.

데이트 살인 한 해 100건

'데이트 폭력'이 단순 폭행을 넘어 살인이나 상해 등 강력 범죄로 이어지고 있다. 데이트 폭력이란 부부가 아닌 연인 사이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성적, 언어적 폭력을 통칭하는 말로 쓰인다. 부부 폭행 사건이 일어난 경우 가정 폭력으로 규정돼 피해자 보호를 위해 여러 장치가 마련돼 있다. 하지만 부부가 아닌 연인 사이일 때는 사랑싸움 등으로 치부되거나 피해자가 방치되는 경우가 많다.

지난해 2월에는 전남 화순에서 동갑인 여자 친구의 목을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갈대밭에 유기한 김모(19)군이 붙잡혔다. 그는 여자 친구가 임신 사실을 자신의 부모에게 알리려고 해 살해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김군은 범행을 감추기 위해 살해한 여자 친구의 휴대전화를 숨기고 여자 친구의 가족과 함께 수색 작업에 동참하는 등 뻔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같은 달 안양에서도 잔인한 연인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 이모(37)씨는 당시 여자 친구(당시 21세)를 목 졸라 살해하고 친구를 만나 당구를 쳤다. 그 뒤 이씨는 시신을 상자에 넣고 차에 실어 공터에 암매장했다. 이씨는 여자 친구의 휴대전화로 그녀의 가족들에게 '잘 지내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내용의 문자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경찰에 따르면 최근 5년간 현재 연인이나 과거 연인의 손에 사망한 사람은 467명이었다. 가해자의 대부분이 남성인 점을 감안하면 한 달 평균 7명의 여성이 데이트 폭력으로 숨지고 있다. 살인뿐 아니라 폭행과 감금, 특수 폭행 사건이 벌어지는 사례도 많다. 작년 한 해에만 데이트 폭력 신고로 총 9364건이 접수됐다. 지난 12월 경기도 용인에서는 "쥐약과 칼을 갖고올 테니 같이 죽자"며 여자 친구를 위협하고 수 시간 감금한 30대 남성이 붙잡혔고 11월엔 여자 친구가 휴대전화를 보여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주먹으로 머리와 얼굴을 때리고 목을 조르고 나서도 병원에 가지 못하게 감금한 남성(36)이 붙잡혔다. 지난 5년간 데이트 폭력으로 인한 상해 사건은 1만3252건이었고 흉기 등을 이용한 특수 폭행은 5687건에 달했다. 연인 사이에 일어나는 강간 사건도 매년 500건에 달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데이트 폭력을 폭력의 늪이라고 한다. 재발률이 다른 폭력 유형에 비해 현저히 높기 때문이다. 치안정책연구소가 지난해 6월 발간한 '데이트 폭력 예방 및 대응 방안 연구'에 따르면 데이트 폭력 가해자의 20.4％가 1년 이내 재범을 저질렀다. 2년 이내에 상대방을 다시 폭행한 비율도 14％에 달했다. 가정 폭력 재범률이 1.9％, 성폭력 재범률이 2.1％인 것에 비하면 매우 높은 수치다.

하지만 한 여성단체의 실태 조사에 따르면 데이트 폭행을 당한 후에도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은 피해자가 61％에 달했고, 경찰에 신고했다는 피해자는 8.5％에 불과했다. 신체적 폭력을 당하고 나서도 관계를 이어간 피해자 중에는 많은 수가 헤어질 만큼 폭행이 심하지 않아서(33.9％), 사랑하기 때문에(31.5％) 헤어지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폭력을 참고 그냥 넘어가는 사례를 더하면 실제 발생하는 데이트 폭력 건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데이트 폭력'이 아닌 '폭력'"

책 '예민해도 괜찮아'의 저자 이은의 변호사는 "연인 관계가 폭력 가해자의 방어막이 돼서는 안 된다"면서 "데이트 폭력은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녹음·녹화 등 증거를 수집하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신고를 하려 해도 보복 폭행이 두려워 피해자들이 선뜻 나서지 못하는 일도 많다"고 했다. 또 "수차례 폭행당한 증거를 어렵게 모아 신고를 한 뒤에도 수사기관이나 사법기관에서 '이유가 있어서 맞은 것 아니냐', '싸우다가 격해져서 그런 것 아니냐'라는 뉘앙스로 피해자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여성단체에서는 데이트 폭력 피해자의 94％가 여성인 만큼 별도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난해 2월 데이트 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안이 19대 국회에서 발의됐으나 심의되지 못한 채 국회 종료와 함께 폐기됐다. 가정 폭력의 경우 지난해 9월부터 가정폭력방지법이 시행되면서 강력히 규제되고 있지만, 규제 대상을 '법률적·사실적 가족관계'로 한정하고 있어 데이트 폭력에는 적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데이트 폭력에 대한 솜방망이 처벌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지난해 데이트 폭력으로 형사 입건된 8367건 중 구속된 것은 449건에 불과했다. 특히 폭행·상해로 입건된 경우 97％가 불구속 입건으로 처리됐다. 한 여성 인권 운동가는 "재발할 것이 뻔히 보이는데도 연인 간 싸움이라 생각해 구속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데이트 폭력이 발생했을 때 현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를 어떻게 분리해야 하는지, 이후 신변 보호 등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 매뉴얼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경찰청은 지난해부터 데이트 폭력 전담팀을 일선 경찰서에 배치했다. 피해자와의 핫라인을 구축하고 임시 숙소를 제공하는 등 신변 보호 노력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데이트 폭력 예방법으로 가장 주목받는 것은 2014년 3월부터 영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일명 '클레어 법'이다. '가정 폭력 정보공개 제도'로 데이트 상대가 폭력을 행사할 가능성이 보일 때 상대방의 폭력 전과를 조회할 수 있는 법이다. 2009년 영국에서 클레어 우드(당시 36세)라는 여성이 페이스북으로 만난 남자 친구 조지 애플턴(47)으로부터 강간을 당하고 목이 졸려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애플턴이 과거에도 연인을 폭행·학대한 전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이 법이 만들어졌다. 데이트 폭력이 워낙 재범률이 높다보니 클레어 법은 매우 효율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우리나라에서 데이트 폭력을 처음으로 범죄학적으로 연구한 한남대 박미랑 교수는 "미국의 경우 데이트 폭력 예방을 위해 중고등학생 때부터 데이트 폭력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아직 관련 교육 프로그램조차 없다"며 "우리 사회가 폭력에 대해 예민해져야 피해자들이 더 적극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픽] 데이트 폭력 신고 건수 기고자 : 김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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