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도서] 공터에서

    박해현

    발행일 : 2017.02.04 / Books A16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김훈 지음 | 해냄 | 356쪽 | 1만4000원

    소설가 김훈(69)의 부친은 무협 소설 '비호'의 작가 김광주(1910~1973)다. 김광주는 청년 시절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활동한 풍운아였다. 무정부주의를 지향한 그의 이상(理想)은 광복 이후 김구가 암살된 뒤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는 임정에서 고락을 함께한 동지들과 함께 6·25를 거쳐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으로 이어진 현실에 절망하면서 이루지 못한 혁명의 꿈을 곱씹어야 했다.

    그는 언론인이자 작가로 활동했지만, 늘 울분을 삭이지 못해 식솔을 챙기지 않은 채 집 밖으로 떠돌아다녔다. 원고료는 술값으로 탕진하기 일쑤였고, 가족은 그런 아버지를 찾아 술집을 뒤지고 다녀야 했다. 중학생 김훈은 모처럼 집에 온 아버지를 힐난했다. 아버지는 허공을 한참 쳐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광야를 달리는 말이 마구간을 돌아볼 수 있겠느냐?"

    김훈은 불혹을 넘겨 전업 작가가 된 뒤 산문 '광야를 달리는 말'을 써서 아버지의 초상을 그렸다. 그는 "아버지에게 말을 달릴 선구자의 광야가 없다는 것을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며 "아버지는 광야를 달린 것이 아니고 달릴 곳 없는 시대의 황무지에서 좌충우돌하면서 몸을 갈고 있었던 것"이라고 씁쓸하게 회상했다. 그런 아버지는 평생 가족을 가난의 수렁에 밀어 넣었다가 말년엔 오래 병환에 시달린 뒤 타계했다.

    김훈이 6년 만에 신작 장편 '공터에서'를 냈다. 그는 아버지의 삶에 대한 추억을 밑그림으로 삼았다. 무릇 작가는 기억을 질료로 삼되, 체험한 그대로 쓰지 않고 상상력을 발동해 입체적 허구를 만드는 법. 이 소설의 아버지는 허구의 인물 마동수(馬東守)다. 그는 상하이에서 아나키스트 운동에 참여해 청춘을 보낸 작가였다. 마동수의 둘째 아들 마차세(馬次世)가 회상한 아버지는 이렇다. '아버지는 늘 피를 흘리는 듯했지만, 그 피 흘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삶의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생활의 외곽을 겉돌고 있었다'는 것. 김광주-김훈 부자의 판박이 같다. 그러나 김훈은 이런 기억의 틀 속에 1920~1980년대 한국 현대사의 상징적 사건과 허구의 인물을 뒤섞어 소설의 의미론적 공간을 넓혀갔다. 여러 세대가 겹친다.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영웅처럼 살고자 했지만, 실패한 세대를 대표한다. 그의 장남 마장세(馬長世)는 아버지 세대의 환상적 영웅주의에 반항한 반(反)영웅적 삶을 추구한다. 그는 월남전에 파병돼 거짓 보고로 '가짜 영웅'이 돼 훈장까지 받지만, 제대 이후엔 괌으로 건너가 치부(致富)에 몰두한다. 차남 마차세는 영웅도 반영웅도 모두 외면한 채 현실에 순응하며 '비(非)영웅'의 길을 걷는다. 그의 삶에서 1979~1980년에 일어난 정치적 사건들은 불가피하고 불완전한 현실의 배경에 불과하다. 그의 내면은 야망도 환상도 없이 '공터'처럼 황량하다. 특히 실리에 약한 그는 숫자를 쓸 때 동그라미를 더 쓰거나 덜 쓰기 일쑤다. 그는 '기호(記號)와 실물(實物) 사이에 허방이 있어서 거기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그의 삶은 공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그의 가족 모두 그렇다. 그의 아버지는 혁명의 환상이란 공터에서 헤맸고, 형은 채울 수 없는 탐욕의 공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몰락한다. 그것은 근대 이후 한국인이 겪은 실제 현실이었고 내면 풍경이었다. 그런 공터에서의 삶을 가리켜 작가는 '세상은 무섭고, 달아날 수 없는 곳이었다'고 묘사한다. 김훈은 이 소설에서 광야를 달리는 말이 아닌, 재갈이 물린 수컷 조랑말로 한국 남성의 초상을 제시한다. '말은 평생을 물고 산 재갈이 아직도 힘든지 혓바닥을 길게 빼서 재갈을 뱉어내는 시늉을 했다. 재갈은 벗겨지지 않았다'는 것. 김훈은 '광야'를 상실한 채 '공터'에서 헤매는 사내들의 허무와 비애를 그 특유의 냉정하고 건조한 문체로 그려냈다. 사내들의 남루한 현실은 배설물 냄새와 뒤섞이거나 생존하기 위해 먹어야 하는 음식 냄새와 함께 제시되기도 한다.

    김훈은 그런 절망의 현실에서 모성에 눈을 뜨기 시작한 여성을 통해 희망의 빛을 찾으려 한다. 이 소설에서 사내들의 마음속 공터는 여성의 사랑으로 채워진다. 문학적으론 진부한 발상이지만, 임신의 기별을 느낀 여성을 묘사하는 김훈 문장의 흡인력 덕분에 새삼스럽게 가슴 깊은 곳에서 희망의 자맥질을 느끼게 한다. '몸속의 어두운 바다에 새벽의 첫 빛이 번지는 것처럼 단전 아래에서 먼동이 텄다'라거나 '두 손을 펴서 아랫배에 얹으면, 먼 지평선을 지나는 기차의 리듬 같은 진동이 손바닥에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라는 문장이 오래 기억된다.

    기고자 : 박해현
    본문자수 : 2306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