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검색목록 > 기사상세보기
타이틀

[편집자 레터] "흰옷에 떨어진 피보다 선명한 中道"

    어수웅

    발행일 : 2017.02.04 / Books A17 면

    종이신문보기
    ▲ 종이신문보기
    "이 나라 소위 좌파들이 선한 사마리아인과 고독한 지식인 행세로 나르시시즘의 허기를 채우고 있다면, 이 나라 우파들은 애국자 행세로 속물의 극치를 보여준다."

    800쪽 넘는 이응준(47)의 두툼한 산문집 '영혼의 무기'(비채 刊)를 읽다가 잠시 멈췄습니다. 무례하게 요약하자면, 자살 행위죠. 한쪽 진영을 비판해도 비난받기 십상인데, 양쪽 모두를 '공격'하다니요. 시니컬하게 뒤집어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한쪽 진영을 선택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게 이 땅 지식인의 현실이라고 말이죠.

    '영혼의 무기'는 등단 27년 된 작가의 첫 산문집입니다. 가끔 요설과 수다도 있지만, 지금의 왜소하고 사소해진 문학에서는 보기 힘든 스케일의 열정과 용기를 종종 만납니다. '광장에서'라는 큰 꼭지 안에 묶은 '지금 우리에게 보수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진보는 무엇인가' '지금 우리에게 중도는 무엇인가' 등의 산문이 특히 그렇습니다.

    원로 시인 S 선생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지금의 한국작가회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시절,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시위를 여러 번 계획했다죠. 문제는 그렇게 핏대 올리던 사람들이 정작 당일 현장에는 나오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덧붙인 말이 이랬죠. "나는 좌든 우든 믿지 않아. 성실한 놈만 믿어." 지금처럼 표현의 자유가 흘러넘치는 세상이 아니라, 정권 비판하면 투옥되던 시절의 삽화입니다.

    이응준도 말하고 있지만, '중도'는 사실 가장 래디컬한 입장일지도 모릅니다. 극우와도 싸워야 하고, 극좌와도 싸워야 하기 때문이죠. 작가는 "흰옷에 떨어진 피보다 선명한 중도는 회색주의가 아니다. 중도는 어설픈 화해를 거부하고 옳은 판단을 내려 행동하는 강력한 이성의 실현이다"라고 썼더군요.

    이번 주 Books의 커버 스토리는 소설가 김훈의 6년 만의 장편 '공터에서'입니다. 공터와 광장. 규모의 차이는 있겠지만, 둘 다 빈터에서 비롯된 물음이군요. 왜소하고 사소해진 문학이 아니라,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작가들을 만나는 경험이 되시기를.

    기고자 : 어수웅
    본문자수 : 1046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
    인쇄 라인 위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