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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승선 통과하고 죽을 것 같았다. 관중 환호가 들렸지만 답례할 힘도 없었다. 몇 초가 지나고서야 비로소 이 순간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지 느꼈다."

5일 만난 국가대표 이채원은 여전히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는 4일 강원도 평창군 알펜시아 크로스컨트리센터에서 열린 국제스키연맹(FIS) 크로스컨트리 월드컵 여자 스키애슬론 15㎞ 경기를 12위(46분2초7)로 마쳤다. 세계 정상급 선수가 총출동한 월드컵에서 한국 선수가 기록한 역대 최고 성적이었다. 서른여섯 닭띠 이채원은 이날 29명의 선수 가운데 두 번째 고령이었다. 크로스컨트리에서는 황혼의 나이다. 그가 이 대회 이전에 세운 월드컵 개인 최고 성적은 2015년 스위스 다보스 월드컵에서 기록한 43위였다. 경기를 지켜본 대표팀 관계자는 "무려 31계단을 올라섰으니 기적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채원(36)은 한국 크로스컨트리의 여왕(女王)이다. 1997년 국가대표로 발탁된 이후 20년째 정상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전국동계체전에서 획득한 금메달만 63개. 체전 최우수선수(MVP)도 세 차례나 차지했다. 메달 수와 MVP 선정 횟수는 국내 최다 기록이다. 1996년 평창 대화중 3학년 때 처음 동계체전에 출전하며 금메달 수집을 시작했고, 금메달을 따지 못한 대회는 출산 휴가로 불참한 2012년 한 차례뿐이었다.

그럼에도 국제대회 성적은 늘 최하위권이었다. 4차례 올림픽에서 40위 내에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이채원은 "뼈를 깎는 노력을 해도 세계 정상급과의 실력 차는 줄지 않았다"며 "자괴감이 들 때도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늘 반전을 마련해 놓는 것이 인생이다. 그는 "2011년 아스타나-알마티에서 열린 동계 아시안게임 크로스컨트리 여자 10㎞ 프리스타일에서 금메달을 따면서 내 삶의 태도도 달라졌다"고 했다. 이는 한국 크로스컨트리 사상 아시안게임 첫 금메달이었다. 그는 "나이 먹는다고 퇴보하는 게 아니고, 경험을 잘 활용하면 오히려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했다. 이후 2016~2017시즌 8번의 극동컵에서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지난해 12월 핀란드 FIS 레이스 크로스컨트리 대회 10㎞에서는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황혼에 꽃이 핀 것이다.

열네 살 중학생 소녀였던 이채원은 어느 날 무작정 교내 스키부를 찾아갔다. 알고 봤더니 크로스컨트리팀이었다. 그때부터 임신과 출산 기간 단 석 달을 빼고는 22년간 훈련을 쉰 일이 없다. 키 153㎝, 몸무게 45㎏인 이채원은 "남들 한 걸음 갈 때 나는 두세 걸음 간다는 생각으로 피땀을 흘렸다"고 했다.

말만 국가대표지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 삶이었다. 고된 훈련이 계속될 뿐 태극마크를 달고 올림픽에 출전해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적도 없다. 그나마 2010년 밴쿠버올림픽 직후에 결혼한 것이 참 행복한 순간이었다고 한다. 2012년 딸(은서)을 낳아 엄마가 되면서 주위에선 은퇴를 예상했지만, 그는 오기로 다시 스키를 신었다. 이채원은 "1년 뒤 평창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인생은 모르는 것"이라고 했다.

평창소녀 이채원은 2018년 평창올림픽을 마지막 무대로 생각한다. 2002년 솔트레이크올림픽을 시작으로 5번째 올림픽에서, 그것도 고향인 평창에서 멋진 피날레를 장식하고 싶어 한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이채원은 딸 은서에게 개인 최고 성적을 약속했다. 영상 통화 하면서 은서가 "엄마 사랑해, 1등 해"라며 하트를 보내자 그는 또 1년 후를 약속한다. "은서에게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한편 대회 마지막 날인 5일 팀스프린트(1.5km씩 6 바퀴를 교대로 도는 경기)에선 러시아의 글렙 레티비흐-파르페노프 안드레이 조가 1위를 차지했다. 여자부는 스웨덴의 엘린 모흘린-마리아 노르드스트로엠 조가 1위였다.

[표] 이채원의 크로스컨트리 도전 22년 기고자 : 정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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