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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년간 체육관 평균대와 마루 위를 구르던 소녀가 입술을 꼭 다물고 눈 덮인 언덕 위에 섰다. 두세 차례 심호흡을 하고 스키를 내디딘 지 5초 후 그는 평창 하늘에 떠 있었다. 그대로 뒤로 한 바퀴를 돈 소녀는 두 발로 정확히 눈밭에 내려섰다. 관객석에서 환호와 박수가 터졌다. 양손을 흔들며 천진스럽게 웃는 그는 한국 최초의 여자 프리스타일 스키 에어리얼 선수 김경은(19)이다.

김경은은 이날 한국 스키사에 작은 발자국 하나를 찍었다. 그는 10일 올림픽 테스트 이벤트를 겸해 열린 FIS(국제스키연맹) 프리스타일 스키 에어리얼 월드컵(평창 보광 스노경기장)에서 45.51점으로 25명 중 20위를 기록했다. 그는 한국 여자 선수 중 월드컵 대회 첫 출전자라는 기록도 갖게 됐다. 중소 대회에 출전하며 FIS 포인트 110.5점에 세계 랭킹 56위를 기록하고 있던 김경은은 이번 대회에서 20위에 오르며 내년 평창올림픽 출전을 확정했다. 올림픽에 나가려면 FIS 포인트 80점 이상, 월드컵 30위 이내라는 두 가지 기준을 동시에 충족해야 한다.

김경은은 불과 반년 전만 해도 스키와 전혀 관련 없는 실내 종목 기계체조 선수였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활발했던 그는 어머니의 추천으로 초등학교 1학년 때 체조 교실에 등록했다가 선수가 됐다. "체조를 하면 중·고등학교에서 장학금도 주고 숙식도 해결해준다고 하더라고요. 체조가 맞았고, 홀로 일하시던 엄마 고생도 덜어 드리고 싶었어요. 금방 하겠다고 했죠."

그는 서울 화계중, 서울체고를 거치며 엘리트로 성장했다. 인생의 반 이상을 체육관에서 보내는 동안 마루, 도마, 이단평행봉, 평균대 외에 다른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상도 자주 탔다. 초등 4학년 때부터 6년 연속 전국대회 단체전 우승을 했고, 개인전 시상대에도 수차례 올랐다. 고교 1학년 때 위기가 왔다. 허리 통증이 심해 찾은 병원에서 '허리 압박 골절'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몇 년째 계속된 고질병"이라며 "치료하더라도 무리한 점프 동작은 위험하다"고 했다. 이 때문에 주종목이었던 도마 대신 평행봉에 주력하기로 했지만 아쉬움이 컸다.

비교적 무리가 적은 이단평행봉 선수로 경력을 이어가던 고 2때 김경은 앞에 조성동(70) 에어리얼 대표팀 감독이 나타났다. 그는 양학선을 길러낸 전 기계체조 국가대표 감독이다. 체조 도마와 비슷한 에어리얼 종목 육성을 위해 대한스키협회에서 영입한 인물이었다. 중국 등 에어리얼 강국이 체조계 인사를 선수·코치로 영입한 사례를 따른 것이다. 조 감독에게서 "에어리얼 스키 선수를 해보겠느냐"고 제안받은 김경은은 수개월 고민했다. 지난해 8월 가족회의에서 '체조 선수로선 전성기가 지나고 있지만, 에어리얼 스키는 네가 길을 만드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김경은은 스키 선수가 됐다.

"처음엔 눈이 무서웠어요." 김경은은 추위와 눈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처음 석 달 동안 김경은은 중국에서 수중 착지 훈련만 했다. 인공 슬로프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가 공중에서 회전한 뒤 물속으로 빠지는 훈련이다. 실제 눈밭에서 훈련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12월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체조에서 익힌 감각 때문에 회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는 것이 그의 말이다. "도마 할 때랑 똑같았어요. 무서운 것도 전혀 없었고요."

인생의 길을 튼 지난 반년 동안 매일 네 시간씩 훈련해온 김경은은 이번 대회에서 '꼴찌 안 하기'라는 목표를 이뤘다. 그의 밑에 다섯 명이나 있다는 사실에 김경은은 하루 종일 웃음꽃 만발이었다. 그는 이번 테스트 이벤트 훈련 때문에 9일 고교 졸업식에 참가하지 못했다. 경기 후 부모님으로부터 졸업장과 꽃다발을 건네받은 그는 "올림픽 출전이라는 새로운 꿈이 현실이 됐으니 슬프지 않다"며 "올림픽에선 꼭 결선(12위 이내)에 진출하겠다"고 했다.

[프리스타일 스키 '에어리얼'이란]

20도 안팎 슬로프 내려와 15m 점프, 공중회전 등 연기… 점프·기술·착지로 점수

프리스타일 스키 선수는 슬로프를 내려오면서 회전이나 턴 동작을 하며 기량을 겨룬다. 순전히 속도로만 경쟁하는 알파인 스키와 다르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선 에어리얼, 모글, 하프파이프, 스키 크로스, 스키 슬로프스타일 등 5개 종목에서 남녀부 경기가 열린다.

그중 10일 경기가 열린 종목은 에어리얼이다. 20도 안팎의 직선 주행 슬로프를 내려와 '키커(kicker)'라고 부르는 점프대에서 도약한 뒤 공중에서 회전, 몸 비틀기 등의 연기를 하고 착지한다. 기계체조의 도마 종목과 비슷한 면이 있다.

1994년 노르웨이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때부터 정식 종목이 됐다.

선수는 높이와 도약 길이가 다른 3개의 키커 중 자기 기량에 맞는 하나를 선택해 점프한다. 점프 높이는 15m 정도다.

공중회전을 쉽게 하기 위해 알파인 스키보다 짧고 가벼운 스키를 쓴다. 점수는 점프 동작 20%(도약, 높이, 거리), 공중 기술 50%(스타일, 동작의 실행 및 정확도), 착지자세 30%로 나눠 계산한다.

올림픽과 이번 테스트 이벤트를 대비해 보광 스노경기장에 에어리얼 코스가 신설됐다. 올림픽 때 야간에 경기가 열리기 때문에 조명탑 32개도 세워졌다.

[그래픽] 보광 스노경기장 에어리얼 스키 코스

기고자 : 이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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