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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가 로버트 어윈(Robert Irwin ·1928년생)의 '무제'는 보면 볼수록 계속 보게 된다. 처음에는 하얀 원을 중심으로 회색빛 클로버 형태가 퍼져 있는 그림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실 하얀 원은 벽으로부터 10㎝가량 떨어져 설치된 볼록한 알루미늄 원반이다. 주위의 회색 원들은 모두 이 원반의 그림자다.

작가는 직경 약 150㎝의 원반 위에 흰색 래커를 100겹 이상 분사하여, 매끈한 광택 대신 빛을 부드럽게 분산시키는 오톨도톨한 재질감이 고르게 느껴지도록 처리했다. 조명은 완벽하게 동일한 형태의 그림자들이 동일한 명도로 겹쳐져 벽면에 어리도록 사방에 설치되었지만 그 광원이 우리 눈에 띄지는 않는다.

이렇게 다 알고 봐도 고체인 원반과 조명의 효과일 뿐인 그림자 사이의 밀도 차이가 쉽게 구별되지 않는다. 원반의 표면은 볼록한 듯 오목하게 보이고, 오목한 듯하다가도 벽에 밀착된 평면처럼 보인다. 이토록 끊임없는 혼란 속에서 시간이 흐르고 나면 나중에는 작품이 아니라 작품을 보고 있는 두 눈의 작용을 예민하게 느끼게 된다. 과연 우리의 눈이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주고 있는가를 의심하면서 말이다.

이처럼 어윈은 작품 자체보다는 사물과 공간, 물질과 환영 사이의 차이를 감지하고 인식하는 지각 능력 자체에 관심이 있었다. 자극적인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눈여겨보지 않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목표는 '당신이 오늘 본 것보다, 내일 조금 더 많이 보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눈을 맹신하지 않는 것, 눈앞에 보이는 것들을 의심하는 게 그 시작일 것이다.

우정아 포스텍 교수·서양미술사


기고자 : 우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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