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뜯긴 문풍지 같기도 하고, 칠하다 만 담장 같기도 하다. 뭣보다 흰색이다. 부분도 아니고 온통 백색(白色)이다.

화가의 늙은 어머니도 허구한 날 흰 물감만 칠하는 아들이 해괴하여 물었단다. "너는 왜 밤낮 흰 칠만 하느냐. 대체 그림은 언제 그릴 거냐." 어머니만큼 백발 성성해진 화가가 빙그레 웃었다. "백자(白瓷)의 흰빛이 좋아서요. 나의 마음 비춰볼 수 있어서요. 머리로는 알 수 없는 것, 그 밑바닥에 있는 걸 백자가 보여주니까요. 종일 하늘을 날았지만 날아다닌 흔적이 없는 새처럼."

면벽 수도하는 선사(禪師)인 양 30년 단색화 외길을 걸어온 화가 김근태(64)가 모처럼 바깥나들이를 한다. 오는 22일부터 3월 1일까지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열리는 '미술이 철학을 사유하다'전(展)이다.

중앙대 회화과를 나온 김근태는 1970년대 모더니즘 세례를 받은 작가다. 엄혹한 군부통치 시절 민중미술이 꿈틀댔지만 그는 오히려 추상에 매료됐다. "1학년 때 '공간'이란 잡지에 실린 이우환 선생의 글을 봤어요. '선으로부터' '점으로부터'에 대한 글이었는데 어린 마음에도 확 와닿는 글귀가 많았어요. (그림에) 형상이 없어도 되는구나, 표상이 없어도 (메시지가) 전달되고 언어가 될 수 있구나 막연히 느꼈지요."

철학과 사색을 동반해야 하는 단색화 작업은 외롭고 가난했다. 거장의 작품을 마주할 때마다 좌절했다. "렘브란트 작품을 실제로 봤을 때의 충격, 범접할 수 없는 시간의 축적들 앞에서 나는 껍데기만 그리고 있었구나 절망했지요." 다시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을 안겨준 건 경주였다. "남산의 작은 불상들, 석굴암, 감은사지의 두 탑 앞에서 전율하며 나의 뿌리, 내 안의 DNA는 이거로구나 깨달았죠. 태어날 때부터 내 몸이 알고 있었던 것, 서양에서는 흉내 낼 수 없는 동양 정신의 미학, 그것을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백자, 그 텅 빈 충만에 매료된 것도 그즈음이다. "이우환 선생이 말했던 노자와 장자의 철학, 비어 있어서 그 쓰임새가 있는 달항아리의 가르침, 그제야 분별하고 이성적으로 따지는 것이 나를 어렵게 했다는 걸 알았어요." 시련이 끝난 건 아니었다. 단색화 열풍이 불기 한참 전인 2000년대 초반.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전 이후 독일 쾰른에서 유학하면서 유럽을 무대로 활동을 전개했지만 정작 국내에선 김근태를 알아주지 않았다. 그를 알아본 건 부산 범어사 주지 수불 스님이다. 안국선원에서 간화선(看話禪·화두를 들고 수행하는 참선법) 배우다 인연을 맺은 스님이 이우환에게 김근태의 작품을 보여준 게 계기였다. "이우환 선생이 '어지간하네. 기다려보면 되겠네' 하시더랍니다. 이후 단색화 바람이 불었지요."

사각의 백색 화면은 완벽하지 않다. 군데군데 흠집과 찢김이 있다. "누구의 삶에나 있는 상처입니다. 굳이 그걸 덮을 필요 없어서 내버려두었지요. 서로 안아주고 보듬어주라고. 요즘처럼 남 아픈 곳만 할퀴는 시절에." 다 같은 백색도 아니다. "스무 번, 서른 번 덧칠하면서 여러 색깔 섞이니 최종 우러나오는 흰색이 다르지요. 저마다의 내공, 마음 풍경이 다르듯." 평론가 윤진섭은 김근태 회화를 "오래된 건축물이나 석탑에서 맡아지는 고졸한 정취. '참나'를 찾아나가는 구도의 과정"이라 상찬했다. 그럼에도 작품이 뜻하는 바를 도통 모르겠다는 관람객도 있겠다고 하자 "워낙 흔한 일"이라고 답해 웃음이 터졌다. (02)507-5755

기고자 : 김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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