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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 미얀마 대사를 마치고 귀국하기 전날 밤, 소수민족 카렌 출신의 대사관 경비원 르윈이 찾아왔다. 최고 학벌과 단아한 외모로 경비를 서는 모습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 눈여겨보았던 사람이다. 그는 먼저 아내가 임신했다고 알렸다. 그 전해 어린 딸을 뎅기열로 잃었을 때 조문하며 새 생명으로의 부활을 믿는다고 위로해주지 않았느냐고 했다. 이어 들고 온 가방에서 빛바랜 표지의 문고본 소설 10권을 꺼냈다. 이별이 아쉬워 선대(先代)부터 보관하던 것을 선물로 가져왔다고 했다.

그중엔 조지 오웰의 '버마 시절(Burmese Days)'이 있었다. 영국이 식민지 주민을 무력하게 순치해 다스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1948년 미얀마(버마)는 독립했지만 1962년 쿠데타로 집권한 군은 오웰이 책에서 고발한 식민 종주국의 가차 없는 통치술을 흉내 내고 따라 했다.

반세기 이어진 폭정은 재작년 아웅산 수지의 선거혁명으로 종식됐다. 그것은 국민의 갈망을 결집한 수지의 카리스마와 서방 세계가 가한 압박의 산물이다. 그런데 미얀마 민주화의 아이콘이었던 그녀에게 요즘 국제사회가 실망하고 있다. 무슬림 소수민족의 고통을 외면한다는 게 이유다. 불교를 믿는 버마족은 전체 인구의 70%를 차지하지만 미얀마에는 그 외의 많은 민족과 신앙그룹이 섞여 산다. 그중 로힝야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이웃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와 서부에 정착한 무국적자로, 약 100만명에 이른다. 불교도의 압박, 당국의 탄압으로 십수만 명이 국외로 피하거나 수용소에서 지내고 그들이 겪는 참상도 알려졌는데 수지가 눈감는다는 비판이다.

수지가 갈 길이 너무 멀다. 잃어버린 시간이 길어 나라 세우듯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겠지만 현실이 각박하다. 무엇보다 군을 대신할 권력 주체가 마땅치 않다. 집권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 소속 국회의원들 전직(前職)이 수지가 처한 어려움을 웅변한다. 농민, 상인, 교사가 많고 재단사, 신문배달원, 대장장이, 막노동자까지 망라한다. 수지에게도 책임이 있다. 수지는 충성심만 있고 역량은 모자란 인물들로 국회를 채웠다. 그 결과 그녀가 없으면 NLD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고 말았다.

군을 정치에서 손 떼게 하기도 어렵다. 미얀마 군부는 무력과 함께 헌법상 권리로 공권력, 국회 해산권, 계엄 선포권을 쥐고 있어 언제든 정부를 마비시킬 수 있다. 두 자녀의 국적이 영국인 수지가 대선에 출마하려면 개헌을 해야 하는데 국회 의석 4분의 1을 배정받은 군부가 이를 막는다.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대다수 국민이 배척하는 로힝야를 감쌌다간 자칫 '국가분열 위기'를 핑계 삼아 군이 다시 나설지 모른다. 친위세력이 유명무실한데 소수민족을 감싸다가 대중 지지까지 흔들리면 수지가 설 땅은 없고, 선거혁명도 물거품 된다.

피델 카스트로는 천신만고 끝에 쿠바 혁명에 성공했다. 그런 그가 "통치에 성공하기가 집권하기보다 다섯 배 어렵다"는 말로 정치적 이상과 현실의 거리를 요약했다. 수지가 바로 그 딜레마에 빠졌다.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국민 기대에 맞추려면 군이 쌓은 기득권의 철옹성을 허물어야 하지만 그러면 정권이 위험해진다. 그래서 주저하는 모습을 보이자 실망한 이들이 그녀에게 "지난날의 투쟁은 구국을 위한 것이었는가, 권력욕 때문이었는가" 묻는다.

1990년 선거에서 이겨 집권할 기회를 군의 개입과 국민의 저항의지 상실로 놓친 이후 수지에게 정치는 '불가능한 최선'보다 '가능한 차선을 찾는 기술'이었다. 그는 '전부 아니면 전무'식의 정치 도박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운전석(권좌)에 앉았지만 자동차(국가) 운전법은 모른다고 세상이 비난한다면? 그건 아웅산 수지가 조국의 민주화 연착륙을 위해 감내해야 할 짐이다.

이주흠 前 외교안보연구원장

※ 외교 이슈와 인문학을 접목한 '외교 오디세이'를 새로 시작합니다. 집필은 이주흠씨가 맡습니다. 대통령 리더십 비서관, 미얀마 대사, 한국외국어대 교수 기고자 : 이주흠
본문자수 :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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