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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ISU(국제빙상연맹) 4대륙 피겨선수권대회 하이라이트인 남자 싱글 프리스케이팅 경기가 열린 강릉 아이스아레나. 23번째로 얼음판에 선 '은반 황제' 하뉴 유즈루(23·일본)의 연기가 끝나자 관중석에서 '인형 비'가 쏟아졌다. 일본 팬 수천 명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하뉴'를 외쳤다. 화려한 연기를 펼친 그의 우승이 확실해 보였다.

하지만 그 달콤함은 5분을 넘지 못했다. 스물네 번째, 마지막으로 프리스케이팅에 나선 '점프 기계' 네이선 첸(18·미국)은 무려 다섯 번의 쿼드러플(4회전) 점프를 뛰며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프리와 쇼트프로그램 합계 307.46점. 하뉴(303.71점)를 넘어선 첸의 얼굴은 경기장 그 누구보다 빛났다.

이번 시즌 시니어 무대에 데뷔한 첸은 이날 자신의 첫 시니어 메이저 국제 대회 우승을 맛봤다. 그는 쇼트·프리 개인 최고점을 모두 뛰어넘으며 하뉴와 하비에르 페르난데스(스페인)에 이어 피겨 사상 세 번째로 300점의 벽을 돌파한 남자 선수가 됐다. 이 대회에서만 자신의 세 번째 은메달(금메달 없음)을 확정한 하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첸이 부럽다"고 했다. 일부 일본 팬은 하뉴의 준우승을 지켜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괴물 같은 점프력과 다소 거친 표현력을 가진 첸의 플레이를 보면 얼음 위의 '마초'란 수식어가 떠오른다. '미소년' 이미지인 하뉴나 우노 쇼마(일본) 등 기존 피겨 스타와는 다른 캐릭터인 셈이다. 실제로 처음 스케이트를 신었을 때(3세) 첸의 꿈은 피겨 선수가 아닌 아이스하키 골리였다. 하지만 네 종류의 4회전 점프를 완벽히 구사하는 그의 기술력은 하뉴와 2014 소치올림픽 은메달리스트 패트릭 챈(캐나다·이번 대회 4위) 등 경쟁자들도 최고로 꼽는다.

첸이 '필살기'를 갖기까지는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됐다. 주니어 시절부터 잦은 부상을 달고 살던 그는 2015년 초 정밀 검사를 통해 골반이 심하게 뒤틀렸고, 그 결과 양쪽 다리 길이도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피겨 직업병이었다. 그는 신체적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강도 높은 재활과 근육 운동을 병행했다. 4분30초(프리스케이팅 기준) 동안 지치지 않는 체력을 만들기 위해 자신만의 '특별 식이요법'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첸은 본지 인터뷰에서 "얼음 바깥에선 웨이트트레이닝에 집중한다. 일주일에 10시간 이상 체육관에서 시간을 보낸다"고 말했다. 강한 정신력도 첸의 장점이다. 지난해 1월 엉덩이뼈 수술을 받고 목발을 짚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6개월 만에 다시 빙판에 돌아왔다.

스케이트를 벗으면 내성적인 '10대 소년'으로 변한다. 첸은 "내 보물 1호는 스마트폰과 기타"라며 "평소엔 조용하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인터뷰가 낯설다"고 했다. 이날 메달리스트 기자회견 때도 질문이 나오면 4회전 점프하듯 '고속'(高速)으로 서둘러 답변하다가 '천천히 답해 달라'는 진행자의 주의를 여러 차례 받았다.

피겨 훈련에 더 집중하기 위해서 첸은 고등학교 졸업을 1학기 남겨 놓고 학업도 중단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면 아버지(의학박사)처럼 의학을 공부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첸은 "아무래도 내가 부상이 많다 보니 의학에 관심이 간다"고 했다. 1년 뒤 평창올림픽에서의 목표를 묻는 말에 그는 주저 없이 '우승'이라고 말했다. 이미 세계 정상권에 우뚝 선 18세 피겨 소년의 각오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기고자 : 이순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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