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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세(亂世)에 영웅 난다고 했다. 한국 바둑은 적어도 국제 성적에 관한 한 유례없는 난세에 빠져있다. 단 한 개의 세계 타이틀도 없이 중국이 이룬 천하 통일을 지켜만 보는 신세다. 단체전이나 신예 대회 등 마이너 기전까지도 중국이 장악했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국기(國技)로 자타가 공인하던 바둑 기상도가 거짓말처럼 뒤엎어졌다.

그래서 영웅이 태어날 수 있는 최적 조건이 마련됐다. 위기를 헤치고 한국 바둑을 구할 영웅은 누구일까. 열이면 열, 모두의 눈이 그의 얼굴을 향한다. 이름 석 자 앞에 항상 '○○개월 연속 한국 랭킹 1위'란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박정환(24)이다. 숫자는 어느덧 39로 늘어났다. 닭 무리 속 한 마리 학(鶴) 같은 존재인 이 청년은 지금 중국 상하이에 가 있다. 제18회 농심배 세계바둑최강전 한국팀 최종 주자 자격이다.

한·중·일 3국 국가 대항 단체전인 농심배의 올해 흐름은 중국의 독주다. 한국(박정환)과 일본(이야마)이 마지막 1명에게 명운을 걸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중국은 커제, 퉈자시, 롄샤오, 판윈러 등 4명이 시퍼렇게 살아있다. 한국이 우승하려면 박정환이 21일 이야마를 따돌린 뒤 중국 네 기사를 눕혀야만 한다. 지난가을 판팅위에게 따낸 1승 외에 5연승이 더 필요하다.

지극히 어려운 미션이다. 6연승의 산술적 확률은 64분의 1로 2%도 채 안 된다. 게다가 세계 최강의 무사들만 남아 있다. 싸울 상대들과의 역대 전적을 봐도 숨이 가빠진다. 이야마에게 1승 2패, 커제에게 4승 4패다. 퉈자시에겐 3승 1패지만 롄샤오와 판윈러에게는 각각 1승 2패와 1패로 뒤져 있다. 도중에 한 판만 져도 한국은 대진표에서 사라진다. 전판이 '단두대 매치'인 셈이다.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전례도 있다. 이창호가 6회 때 중국 셋, 일본 둘을 눕히고 한국의 대역전 우승을 이끈 사건은 이제 신화가 됐다. 요다는 7회 때 막판 3연승으로 일본에 전무후무한 우승을 안겼고, 창하오는 9회 때 4연승하며 중국의 첫 단체전 우승을 완성했다. 역경 속의 조국을 구한 진정한 영웅들이다.

박정환도 한국의 농심배 제패에 '눈동자'를 찍은 경험이 있다. 4년 전 14회 때 최종 주자를 맡아 셰허, 장웨이제를 연파하고 한국에 역전 우승을 선물했다. 이듬해에도 2연승 후 또 한 번 역전 드라마를 쓰는 듯했으나 최종국에서 중국 스웨의 벽에 막혔다.

올해 대회서 한국은 이세돌 이동훈 강동윤 김지석이 단 1승도 못 올리면서 중국 판팅위에게 7연승을 허용했다. 박정환은 그 판팅위를 제지함으로써 한국 몰패의 수모를 막았고 대역전의 꿈을 되살렸다. 진로배 포함 총 22번의 국가 단체전서 16회나 우승했던 한국이 자존심을 회복할 기회를 남긴 것이다. 중국은 5번 우승에 그쳤지만 최근 3연패(連覇)를 이루는 등 기세가 등등하다. 농심배 단체 우승 상금은 5억원이나 되지만 2·3위 팀에는 한 푼도 없다.

박정환은 격전지로 떠나기 전 "후회 없이 싸우고 오겠다"는 짤막한 한마디를 남겼다. "신에겐 아직 배 12척이 있습니다(尙有十二隻)" 하며 12척으로 왜선 133척을 압도했던 이순신 장군의 명량해전 출사표를 빼닮았다. 박정환이 위기에 빠진 한국 바둑을 구해 우리 시대의 충무공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