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야 아쿠야, 인타 하비비(내 형제여, 넌 내 사랑이야)."

동성 애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아랍 남자끼리 서로 부를 때 흔히 쓰는 표현이다. 거리에서 처음 보는 외국인에게도 아랍인은 곧잘 '형제'라 부르며 살갑게 대한다. 해질 무렵 카이로(이집트)나 다마스쿠스(시리아) 같은 아랍 국가 도시를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따알라, 오오드(이리 와서 앉으라)"라고 손짓하는 '즉석 식사 초대'를 어렵지 않게 받는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인은 예외다. 2015년 7월 예루살렘에 특파원으로 팔레스타인 지역인 동(東)예루살렘에 갔다가 적잖게 당황했다. 다른 아랍 국가 사람들과 달리 팔레스타인인들은 악수하자며 내민 손이 무안해질 만큼 냉랭했다. 한 마디 건네면 두세 마디 더하며 화답하는 게 통상적인 아랍 화법인데, 팔레스타인인은 사교용 수다를 사족(蛇足) 취급했다.

해를 넘겨 팔레스타인 친구가 많아지면서 이들이 '차가운 아랍인'이 된 이유를 알게 됐다.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 거의 관련이 없는 동아시아인조차 이스라엘 간첩일 수 있기 때문에 낯선 사람과는 웬만해선 말을 섞지 않으려는 습관이 몸에 뱄던 것이다. 이들 사이에 알려진 이스라엘 간첩의 유형은 특별한 직업이 없는데도 여기저기 바삐 다니며 사진을 찍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적당한 회사에 다니며 편하게 사람을 만나고, 날씨나 음식같이 민감하지 않은 주제를 꺼내며 천천히 관계를 맺는 '친근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첩보·공작 대상국에 평범하게 자리 잡고 의심 가는 행동을 하지 않으며 지내는 요원을 '슬리퍼 에이전트(sleeper agent·잠자는 첩보원)'라고 한다. 이들은 오랜 기간 동면하는 곰처럼 가만히 있다가 어느 날 임무가 주어지면 '친근한 사람'에서 '수상한 사람'으로 돌변해 움직인다고 한다. 임무의 종류는 암살, 시위 주동 등 다양하다. 2010년 이스라엘 첩보부 모사드가 두바이 한 호텔에 투숙한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 핵심 간부를 암살한 사건에도 '슬리퍼 에이전트'가 여럿 동원된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17일 말레이시아 수도 쿠알라룸푸르 남부 아파트촌에서 북한 남성 리정철이 긴급 체포됐다. 김정남이 쿠알라룸푸르공항에서 지난 13일 암살된 지 나흘 만에 사건 용의 선상에 북한 국적자가 공식적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현지 수사 당국이 조사해보니 리정철은 이번 사건을 앞두고 평양에서 급파된 간첩이 아니었다. 그는 한참 전인 2013년 말레이시아에 입국해 현지 업체 직원으로 취직하고 떳떳한 신분으로 있던 외국인 근로자였다. 대학생 딸까지 두고 같이 지냈다. 그렇게 그가 지난 4년간 얌전하게 지냈던 건 김정남이 살해되던 지난 13일 오전 9시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였음이 드러나고 있다. 동면에서 깨어날 타이밍을 기다리는 북한의 또 다른 '슬리퍼 에이전트'에 우리는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 이번 암살 사건이 던진 숙제다. 기고자 : 노석조
본문자수 : 1442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