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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게 얼마나 막막하면 저리 서럽게 우나. 쌀 포대를 엎지른 딸아이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그 많은 쌀을 어떻게 다 주워담을지 착잡했을 거예요. 자기가 쏟아놓은 쌀 앞에서 울고 있는 장면이 인생과 비슷해 보였어요." 그것은 슬픔이라기보다 설움에 가까웠고, '서럽다'보다는 '설웁다'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울음을 삼키는 발음 같지 않나요?"

허은실(42) 시인이 데뷔 7년 만에 첫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문학동네)를 펴냈다. 입속에 삼켰던 축축한 단어를 꺼내 널어 인생의 막막을 드러내는 일련의 시는 매우 서정적인 라디오 오프닝 멘트를 떠올리게 한다. "2000년부터 지상파 라디오국에서 주로 시사·교양 프로를 맡았어요." 2011년 출산을 하게 되면서 잠시 자리를 비웠고, 이듬해 영화평론가 이동진씨를 만나 책 소개 팟캐스트 '빨간책방'을 맡게 됐다. 허씨의 오프닝 멘트는 자체로 시(詩)였다. 소문을 탔고, 2014년 오프닝 멘트를 묶은 책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을 내기도 했다. 쓰는 건 언제나 막막한 일이었다. 작년 어느 가을 밤, 남편이자 시인인 김일영(48)씨가 쓱 말했다. "그렇게 막막하면 막막함에 대해 써봐." 그렇게 탄생한 멘트가 아직도 인터넷에서 회자된다. '막막(寞寞)이란 글자는 사막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사막을 건너는 사람에게 위안이 되는 건, 역시 또 수억 광년을 막막히 건너 온 별빛이네요.'

방송은 입과 혀의 영역이다. 시집에도 입과 혀의 심상이 자주 출몰한다. '배를 깔고/ 몸을 밀어/ 가는 것들/ 온몸이 혀다// 쓰리고 느리게/ 기어서/ 길을 핥는다.'(혀) 그에 따르면, 시인은 세계를 핥는 혀다. "언어를 발화하는 혀, 맛보는 혀, 상처를 소독하는 혀이기도 하죠." 시인의 혀는 삶과 죽음을 오간다. "출산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갓 태어난 딸을 보니 쭈글쭈글한 아빠를 낳은 듯한 느낌이 들더군요. 신기했어요. 삶과 죽음이 그리 극명히 맞물린다는 것이." 어찌 보면 그의 시는 아버지가 완성한 것이다. 시 '푸른 손아귀' '뱀의 눈' '이별하는 사람들의 가정식백반' 등이 그러하다. 시 '치금매입'은 아버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울 종로3가 귀금속 상가에 들렀다 쓰게 된 시. '돌아서서 식구들 몰래 지갑을 열어보던 사내/ 앞니 벌어진 잇새로 새버리는 웃음이/ 너무 환해서 휑하다.' "자기 금니를 파는 사람들의 불우와 궁핍에 대한 얘기였는데 아버지가 떠오른 거죠. 아버지가 시를 보시(布施)하나 싶을 정도예요."

1999년 최승자의 시집 '내 무덤, 푸르고'를 선물 받아 읽고 나서 처음 시에 눈 떴다. 다니던 광고 회사를 그만뒀고, 2002년쯤 최씨의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내 글을 쓰고 싶다는 허기에 시달리면서 중독돼 갔죠." 그가 웅얼거리는 시가 자꾸 상처를 맛보려 한다. 상처에 자꾸 가닿으면서 치유하려 한다. "모든 설움이 잠깐에 그치길 바랍니다. 이 시집이 상처를 쓰다듬는 혀가 돼주길 바랍니다." 기고자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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