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이신문보기

"야 이대호, 니 오늘 병살타 마이 치니 배부르나? 뭘 째리 보노, ×자슥아."

1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해운대'(2009)에서 만취한 설경구는 관중석 난간에 매달려 야구 선수 이대호에게 조롱과 욕설을 퍼붓는 코믹 연기로 깨알 같은 재미를 선사했다. 하지만 영화 속 이 장면이 현실에서 일어나면 웃음은커녕 지켜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이다.

지난달 29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열린 두산―롯데전 8회초. 두산 좌익수 김재환이 수비하러 외야에 들어서자 롯데 팬 10여 명이 좌측 외야 난간으로 몰려들어 그에게 온갖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7회말 심판의 판정 번복(아웃→세이프)으로 3루에서 살아남은 김재환이 득점하며 역전한 데 대한 불만이었다. 이들은 김재환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내밀고, 부모를 들먹이는 폭언을 쏟아냈다. 안전 요원 5명이 제지에 나섰지만 "자제해 달라"고 달래는 정도였다.

'갑질 관중'은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월드컵 히어로 안정환은 선수 시절 관중의 도를 넘은 욕설을 참지 못하고 관중석에 뛰어든 적이 있다. 관중이 안정환의 아내까지 거론하는 저질 발언을 끊임없이 쏟아낸 게 발단이 됐다. 농구 선수 하승진은 코뼈가 부러져 라커룸으로 향하던 중 "열심히 뛰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은…" 하는 비아냥을 듣고 관중을 향해 위협적으로 다가갔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두 사건에서 관중에겐 어떤 처벌도 없었다.

스포츠 마케팅 담당자들은 "'손님(관중)은 왕'이라는 금언을 떠받들다 보니 소란을 피우는 관중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다. 그래서 관중 문화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말한다. 야구단 관계자들은 "난동 부리는 관중도 우리 처지에선 손님이다. 그를 무리하게 내보내는 모습을 다른 관중이 어떻게 볼지 걱정된다"고 한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구장을 관리하는 안전 요원들만 '감정 노동'에 시달린다. 잠실야구장에서 만난 안전 요원은 "술 마시고 욕하는 관중 몸에 손이라도 댔다간 '폭행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한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갑'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는 조금씩 바뀌고 있다. 최근 기업 콜센터는 '고객의 성희롱·폭언·욕설 전화는 상담사가 먼저 끊어도 좋다'는 지침을 도입하고 있다. 손님은 왕이 맞지만, 폭군 같은 밉상 고객까지 왕 대접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훌리건의 원조 격인 유럽에선 난동을 피우거나 폭력을 행사한 관중은 즉시 퇴장되고, 블랙리스트에 올라 구장 출입이 원천 봉쇄된다.

프로야구가 출범한 지 36년이다. 이젠 경기장에서도 갑질 관중을 격리할 때가 됐다. 경기 단체들은 엄격한 관련 규정을 만들고 지켜야 한다. 선수는 물론 다른 선량한 관중, 스탠드의 진짜 '왕'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경기장은 아이들도 와서 놀다 가는 가족 놀이터다. 상욕을 퍼붓는 '갑질 관중'에게서 아이들이 뭘 배우고 가겠는가. 기고자 : 김승재
본문자수 : 1422
표/그림/사진 유무 : 있음
웹편집 :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