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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서울에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했다. 20년의 세월이 흘러, 서울엔 강남과 강북을 나누는 거대한 벽이 건설된다. 바이러스 면역 보유자들은 강북 지역에 벽을 세우고 안전한 주거지에서 생활하고 있으며, 바이러스 감염자들은 강남 지역에서 생존에 허덕이며 강북으로 넘어가기 위해 필사적이다. 현실의 전복. 이것이 올해 말 출간 예정인 장편소설 '창백한 말'이 펼쳐내는 공간이다. 소설가 최민호(42)씨는 "좀비라는 괴물 자체가 현대의 '계급화'를 묘사하기 좋은 상상력"이라며 "무국적의 배경보다 지금 현재의 대한민국을 비틀어 보여주는 것이 더 강렬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좀비를 통해 대한민국을 문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시도되고 있다. '창백한 말'은 제6회 '좀비 아포칼립스 문학상'의 대상 수상작. 출판사 황금가지 김준혁 주간은 "수상작 대부분이 소설적 배경을 한국으로 설정했다"며 "정치·경제적 혼란상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에 용이한 데다 아파트나 백화점 등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도심이 공동화(空洞化)됐을 때 좀비가 서식하기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복도훈(44) 한예종 교수는 최근 강의공간 대안연구공동체에서 좀비 수업을 개설해 '한국은 왜 좀비가 번성하기 좋은 나라인가'를 설명했다. 이탈리아 철학자 마우리치오 라자라토의 개념을 빌려와 좀비의 출현을 호모 데비토르(Homo Debitor), 즉 '빚진 인간'과 연결한다. "빚진 인간은 자신의 고된 노동을 통한 채무 변제의 노력에도 더는 물질적·심리적 채무 이행을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버린 신체"이고 "어떤 각성이나 반성, 희망 없이 무한정 걷거나 뛰는 좀비 떼를 암시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다수가 빚을 지고 살아간다는 점, 빚 갚기 전에는 죽어도 죽은 게 아니라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좀비민국'이다." 현재 국내 가계부채는 1400조원에 달하고, 이달 중순 금융위원회가 가계부채 종합 대책을 내놓을 예정이다.

북한과의 갈등 역시 극적인 좀비의 현현을 낳는다. 복 교수는 2016년 북한이 핵폭탄을 발사하면서 피폭된 서울이 좀비굴로 변한다는 내용의 장르소설 '폐쇄구역 서울'(2012)을 언급하면서 "한반도를 둘러싼 실제적인 핵 위협의 공포, 강대국의 정치적 압박 등이 극단적 형태로 가공된 이야기지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지 않길 바라는 두려움이 이 소설을 구상하게 한 동력일 것"이라고 짚었다.

기고자 : 정상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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