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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을 가득 채운 욕조에 앉은 여성 스파이 '로레인'(샬리즈 시어런). 하얀 몸과 핏빛 상처의 대비가 도드라진다. 천장에서 내려다보던 카메라가 미끄러져 내려오며 그의 뒷모습을 비출 때, 유연한 등 근육은 보아뱀처럼 꿈틀댄다. 덩어리진 근육을 내세워 둔탁하게 부딪히는 마초 남성 영웅들과 달리, 아름다운 동시에 효율적인 여성 스파이 액션의 도입부다. 지난달 30일 개봉한 '아토믹 블론드'는 오랜만에 만나는 '어른을 위한 여성 스파이 영화'다. 유머를 뺀 '킹스맨' 혹은 '존 윅'의 여성 버전이라 할 만하다. 감독은 '콘스탄틴'(2005), '본 시리즈' 등의 스턴트 감독을 거쳐 키아누 리브스 주연작 '존 윅'(2014)을 연출했고, 내년 개봉하는 '데드풀 2'도 만드는 데이비드 리치. 작품 목록만 봐도 이 영화의 액션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피 냄새 물씬한 스파이 액션

장벽 붕괴가 임박한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전 세계 스파이들의 신원과 극비 활동이 담긴 마이크로필름 '리스트'와, 그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요원 '스파이글래스'의 행방을 놓고 영국 MI6, 미국 CIA, 소련 KGB의 특급 요원들이 격돌한다. 무엇보다 '아토믹 블론드'는 특유의 고혹적 우아함과 몸 사리지 않는 격투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샬리즈 시어런의 영화다. 파충류를 닮은 청회색 눈동자에 눈부신 금발을 한 그녀는, 터미네이터 같은 동독 경찰과 KGB 스파이들에게 홀로 맞서며 뼈가 꺾이고 살이 튀는 맨몸 액션으로 위기를 돌파한다. 액션 안무는 원을 그리며 춤을 추고, 열쇠나 와인 오프너 등 일상 사물을 활용한 격투도 참신하다. 기능적으로 소비되는 점이 아쉽지만, 제임스 매커보이(엑스맨)나 소피아 부텔라(킹스맨) 등 특급 조연들도 좋다.

그래픽 노블 '콜디스트 시티(The Coldest Cities·2013)'가 원작인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스타일'이다. 베를린이라는 도시도, 미국 청바지와 음악에 열광하는 동독 젊은이들도, CIA 안가의 붉은 색 마키아벨리 책도 모두 비장한 드라마를 위한 배경일 뿐이다. "재능은 과대평가되기 쉬우나, 요즘 헌신이나 신의 같은 자질은 드물지." 베를린 KGB 책임자가 무심한 듯 내뱉는 말처럼, 배우 대신 CG가 주인공인 영화가 대세인 요즘 이렇게 피와 살 냄새 물씬 나는 영화는 드물었다.

◇고품격 여성 스파이의 계보 잇다

고전영화 속 여성 스파이는 품위 있고 강인했다. 특히 1차 대전 당시의 전설적 이중 스파이 '마타하리'는 그레타 가르보와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연기를 통해 여성 스파이 캐릭터의 전설로 남았다. '여성 스파이=미녀'라는 공식도 이들에게서 비롯됐다.

그러나 007 시리즈의 성공으로 바람둥이 마초 남성 스파이물이 득세하면서, 여성은 몸에 꼭 끼는 드레스를 입고 남성 스파이를 장식하는 '본드 걸'로 전락했다. 이런 구도를 뒤집은 여성 스파이 영화도 있었다〈그래픽〉. '니키타'(1990·감독 뤼크 베송)와 '롱 키스 굿나잇'(1996·감독 레니 할린)은 '과거와 단절된 인간 병기'의 콘셉트. '솔트'(2010)의 앤젤리나 졸리 역시 액세서리로 전락한 여성 스파이의 위상을 재정립한 영화다. 일상 사물로 바주카포를 만들고, 고층 빌딩 외벽을 기어오르는 그의 매력은 최강 남성 스파이 캐릭터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영화, '아토믹 블론드'가 있다. "선한 싸움이라 생각하지만, 결국 깨닫게 되지. 너도 나도 사탄의 조력자였다는 걸." 로레인이 가슴의 총상을 눌러 밟을 때, 남성 스파이는 고통에 신음하며 말한다. 로레인은 그 이마에 대고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또 한 명의 냉철한 여성 스파이는 그렇게 탄생했다.

[그래픽] 우리가 사랑한 영화 속 여성 스파이들 기고자 : 이태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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