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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나온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본 적이 있다. 운전할 때 어떤 차가 당신을 가장 화나게 만드냐는 질문이었다. 난폭 운전을 하는 차? 신호 위반하는 차? 결과는 의외였다. 압도적 1위는 '느리게 운전하는 차'였다. 과속에 난폭 운전으로 타인의 생명을 위협하는 차가 아니라, 고작 '느린 차'를 가장 미워하다니.

어쩌면 그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요리사 초년병 시절 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주방 용어를 익히지 못하는 내 '느린 귀'였다. 호텔에 입사해 사무직으로 배치됐다가 주방에 들어간 탓인지, 선배 요리사들이 쓰는 용어를 알아듣지 못해 일 배우는 것이 더뎠다. 답답해 미칠 노릇이었다.

하루는 선배들을 도와 뷔페 음식을 차리러 갔다. 바삐 움직이던 선배가 내게 '실팬'을 가져오라고 했다. '뭐? 실팬? 가늘게 써지는 볼펜? 그건 아닐 거야. 실로 만든 프라이팬?' 만화 속 장면처럼 내 머리 위에 오만가지 물건이 뱅글뱅글 날아다녔다. 바보처럼 멍하게 서 있던 나를 한심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던 선배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 선배가 말한 건 '시트 팬(sheet pan)'이었다. 식기 등을 담는 넓은 쇠 쟁반이다. '세상에 그걸 그렇게 발음하다니!' 지금이야 웃으며 말하지만 당시엔 큰 스트레스였다. 요리사를 그만둬야 하나 생각할 정도였다. 만약 '주방 은어사전' 같은 책이 있었다면, 그게 수백만원이었어도 망설임 없이 샀을 것이다.

요리사의 꿈을 접는 대신, 그 시절부터 나는 뭐든 기록하는 습관을 들였다. 주방에서 쓰는 용어와 그 뜻부터, 선배들에게 배운 모든 것을 기록했다. '주방 은어사전'은 찾지 못했지만, 그 대신 더 열심히 다른 책들을 읽는 습관을 만들었다. 돌이켜보면 이런 작은 습관들이 30여년 내가 주방에서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의 원천이 아닌가 싶다.

※5월 '일사일언'은 유재덕 셰프를 비롯해 허명현 음악평론가, 이광표 서원대 교수, 이주란 소설가, 전은경 월간 디자인 편집장이 번갈아 집필합니다. 기고자 : 유재덕 웨스틴조선호텔서울 총주방장
장르 : 고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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